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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보도연맹학살사건 항목의 변화

보도연맹 학살사건 (r30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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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전쟁발발 무렵 보도연맹원들 동향[편집]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보도연맹은 본래 공산당으로부터 전향한 조직이므로, 명백한 배신자라고 할 수 있다.[11] 때문에 북한이 남한을 점령할 경우 이들의 배신 행위에 대한 처벌이 있으리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전쟁이 터진 후 말 그대로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당했을 당시에 북한군의 처벌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앞장서서 인민재판과 남한 정부인사 및 군경 패잔병 색출에 나섰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백. 정백은 공산당 최고참격 간부 출신으로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을 맡았던 핵심간부였다. 그러나, 정백 역시 북한군에 의해 '기회주의자의 표본'으로 몰려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한다. 이를 근거로 오늘날 수꼴들은 '보도연맹은 두말할 거 없이 위장으로 가입한 좌빨들, 다 때려 죽일 수밖에 없다'고 변명한다.[12] 하지만 이는 일면적인 주장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진 숙군 등에서 대한민국 지역 내 공산당 조직들은 속속히 붕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무렵. 대부분의 보도연맹원들은 정부의 지시에 잘 따랐다고 한다. 보도연맹 입안추진자이자 주요 간부였던 사상검사 오제도와 사상검사 정희택[13]에 따르면, 6월 28일 서울을 철수하기까지 각 구(區) 보도연맹 지부를 돌아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의 모든 ‘동태를 장악’하였는데, 서울 지역 보도연맹원은 개전 초기 예비검속되어 각종 반공 구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6월 28일 정부가 피난 가기까지 서울지방 보도연맹원들 상당수는 예비검속된 후 담당 검사의 통제를 받았다. 서울 지역은 각 구(區) 보도연맹원은 검찰 지휘 하에 소집되어 반공 활동을 하였고, 보도연맹 의무실(전 공산당에서 전향한 의사, 간호원으로 편성)에는 비상구호반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란민 안내와 구호사업, 포스터 부착 등의 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희택은 "시민이 피란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만 6천 8백명의 보련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14]

"1950년 3월 철도보도연맹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6.25 때 후퇴하는 가운데 철도 수송에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정부에 충성했었다. 6.25 사변이 돌발하자 25일에는 타공전시체제(打共戰時體制) 강화를 했고, 26일과 27일 양일은 특히 보련 의무실이 청량리 밖 문이과대학 교정터에 이동의무실을 가설하고 2백여 명의 피난민을 무료로 구호했던 것이다." -오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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