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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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만화판 일본침몰 작화가 一色登希彦, 만화가를 그만두다

https://twitter.com/ishikitokihiko

1993년에 데뷔하여 2011년까지 일본 동경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주후 미에현에서 시작한 道瀬食堂(식당)은

17년에 폐업했으나

도쿠시마 현의 스즈미야 식당의 공동경영,조리를

하고 있다.

2016년에는 아내와 이혼했다.

元町夏央(모토미치 나츠오)




나의 생각

안타깝구나



사춘기 르네상스 다비드군 1권 감상.jpg










재미있다. 여성 캐릭터들이 좋았다.









2019년 1월 14일 150통 보냄(누적470통).jpg 팬레터



오늘도 대만, 일본, 프랑스, 해외 만화가들에게 팬레터를 보냈다.

올해 목표 1천명 보내기 운동을 달성할수있을까



업계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죽는 이야기

http://yashiroazuki.blog.jp/archives/15197005.html

만화 업계의 아는 사람들(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이

많이 죽는 이야기

아마도 건강이 나빠서 그런거 같다고 합니다

만화업계, 큰일이군요



(답장) 알료샤 작가, 콘도 루루루 선생이 보냈다.jpg (누적4통) 팬레터


볼프64 : 부동산 가격을 강제로 내리면 된다

https://blog.naver.com/volf64/221437851930

집값을 내려도 살 사람 없어요 → 그럼 더 내리세요

서울 강남구 A 공인 : 거래 절벽이 갈수록 심해지네요.

호가를 낮춰도 매수문의 조차 없습니다. 

간혹 저가 급매물 한두 건 팔렸다는 소식이 들려도 그뿐이지, 

예전 같은 추격매수는 없네요

볼프 64 : 그럼 더 내리시면 되겠군요오

한 천만원대로 내려 보세요. 제가 사드릴게요. 아무리 흙수저라도 그정도의 구매력은 있어요

옮긴이 주 : 저렇게 과장하는 사람은 100% 믿으면 안된다

볼프 64 : 내가 진짜 화나는건, 이렇게 부동산을 때려잡으면 얼마든지 잡을수있었던것을

이명박근혜 그 등신 머저리 새끼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도대체 그 새끼들은 9년동안 뭘 한건가?

자기네들 배에 기름테 두르는거 외에는 할줄 아는게 없었던건가?

강남 복부인과 강남 공인중개사들은 전부 한강 밑바닥에서 반상회나 가지면 되겠다.

남은 부동산들은 우리가 적절히 처리해 줄테니까

나의 생각

볼프64는 현실감각을 잃었다. 

국가에서 부동산 가격을 강제로 내린다는건 어이없다


(답장) 베르세르크 작가, 하스미 도시코 작가(누적 3통) 팬레터


2019년 1월 7일 3백통 보냈다. (누적 320통) 팬레터




일본, 대만, 중국 등등

해외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3백명에게

팬레터를 보냈다

그들이 잘 봤으면 좋겠다

물론 구매 증거도 보냈다



로젠메이든 외전 작가가 답장 보내줌 팬레터


로젠메이든 외전




로젠메이든 외전 작가 카루키 하루 선생이 답장을 보내줬다



나도 답장을 보내야지




카루키 하루 선생님께

첫눈에 눈으로 알아봤습니다. 감상

2019 겨울 리본 스페셜

재미있네요

선생이 그리는 미녀 귀엽고 아름답네요

답장 감사합니다. 

조폭은 나빠도 선생이 그리는 건달은 멋있습니다. 

난필난문을 용서하세요

2019년 1월 5일

xx 올림

특무실장 Z : 2019년도 근하신년 데스!






2019년 1월 3일 20통 보냈다. (누적20통) 팬레터



일본 만화가, 대만 만화가, 해외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를 향하여 보내는 

천통운동

2019년 개시!

20통 보냈다.



여성과 범죄 이야기를 할때 주의점


여성들은 범죄 사건이 일어나면

여성에게 감정이입하고 여성의 피해에 과잉적으로 받아들이고

여성의 잘못에 관대하다

그래서 같은 조건이라도

여성이 남성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관대하고

남성이 여성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용서 못하는 특징이 있다

이럴때는 여성이 여성에게 범죄를 저질렀을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이라고 보도해도 진짜 남성이 아니라 남장여자라고 의혹을 제기할수있다. 

그러면 여성들이 "여성이 가해자라니 절대 옳군!"이라고 생각하여

범죄 이야기에서 져준다



아키소라, 전자판으로 발매되다











https://www.amazon.co.jp/dp/B07M99K3XR/

200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에로만화, 아키소라가 전6권이

전자판으로 발매되었다



오늘도 볼프64가 선동을 합니다.

http://blog.naver.com/volf64/221432698637

리빙 포인트 : 쉽게 알아보는 병신 감별법

"박정희 보고 다카키 마사오라고 하니까 나도 김대중을 도요다 다이쥬라고 부르겠다"

이런 주장하는 사람이 당신 주변에 있으면 병신 취급해주면 됩니다

저런 논리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비슷한 급이어야한다는 전제조건이 성립되어야하는데,

문제는 그 둘은 전혀 동급이 아니라는 거지.

김대중이 여자끼고 술처먹었다는 증거조차 대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얼어뒤질

도요다 다이쥬야 병신 새끼야 ㅋㅋㅋㅋ

그래 김대중이 자기 반대하는 정치인 납치해서 죽이려고 했다고?

스위스 은행 계좌에 국민들이 피땀흘려 번 돈 횡령질 했다고?

김대중이 다카기급의 인간 쓰레기란 증거가 갖고 온 뒤에 도요다 지랄을 하거라

암 그라제 내맘에 드는 정치인은 학살하고 반란 일으켜도 애국자랑께 ㅋㅋㅋㅋ


코멘트 volf

IMF에서 나라꺼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봐야하고
그리고 경제개발했으면 사람 죽이고 갑질해도 된다는 그 정신머리 자체가 썩은거죠.
꼭 그런 애들이 지가 갑질당하면 난리쳐요

자유독립(https://blog.naver.com/independence1919)

방 속에서 숨어서 라디오를 들으며 일본군이 승전을 거두는 전장이 북진하는 것을 듣고

일제의 패망을 예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 학교 선생까지 때려치고 출세하겠답시고

만주군관학교 들어가서 혈서 쓰고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까지 해서 만주군 장교로 부임한 다카기 마사오 수준

팩트로 따져보자

IMF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6714&C_CC=BB


  姜慶植씨는 자신이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내어놓았던 정책을 반대하였던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자 그 정책을 그대로 추진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길게 말할 것 없이 1997년에 내가 편 정책이나 하고자 한 정책, 구조개혁 노력 중에 잘못되었다고 해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다음 그만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딱 하나가 있다. 부도유예협약을 없앴다. 기아가 악용했기 때문에 어쨌건 보완이 필요했다. 김대중 정부에선 대신 워크아웃제도를 도입했다. 또 하나가 있다. 기아가 和議(화의)신청을 했을 때 정치권을 비롯해 일부 언론 등 많은 사람들이 기아의 화의를 받아들이라고 내게 압력을 가했다. 그렇게 화의를 받아들이라고 앞장섰던 야당이 大選에서 승리하자 기아와 같은 대기업은 원천적으로 화의신청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97년 한 해 동안 고심해서 마련한 여러 정책과 개혁법안들은 외환위기를 맞았을 경우에 곧바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미리 알고 준비한 것처럼 요긴하게 쓰였다. 외환위기를 당한 후에 “어떻게 했더라면 외환위기를 겪지 않을 수 있었는가?”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답은 간단하다. 외환위기 이후에 한 구조개혁을 1997년 이전에 미리 했더라면 외환위기는 없었다. 당초 내가 하려고 한 정책과 구조개혁을 그대로 실현했더라면 당시 금융시장 안정과 외환시장 안정에 가장 핵심 관건인 신뢰 확보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姜慶植씨는 김대중씨도 換亂의 한 책임자라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볼 때 換亂 主犯을 지목해야 한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금방 가려진다. 1997년에 추진하고자 한 구조개혁을 하지 못하게 한 사람들이야말로 換亂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綜金社(종금사)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해외영업을 하도록 하고 이들 종금사가 短期로 빌린 돈을 長期로 대출하는 위험한 영업을 무분별하게 하도록 방치한 사람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한보, 기아 등 대기업 경영인들도 해외 금융시장의 신뢰를 떨어뜨린 데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IMF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안정시켜야 할 금융시장을 오히려 요동치게 만든 사람, 대통령 선거 득표전략을 위해 IMF 재협상론을 들고 나온 김대중 후보, 창고가 비었다는 발언으로 금융시장을 혼란으로 빠뜨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등도 책임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 이렇게 짚어 가다 보면 책임이 없는 사람이 누구인가 짚어가는 쪽이 더 바르다.

http://sundayjournalusa.com/2005/04/21/35%eb%85%84%eb%a7%8c%ec%97%90-%eb%aa%a8%ec%8a%b5%ec%9d%84-%eb%93%9c%eb%9f%ac%eb%82%b8-dj%ec%9d%98-%eb%b2%84%eb%a0%a4%ec%a7%84-%eb%94%b8-%ed%86%b5%ed%95%9c%ec%9d%98/

35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DJ의 버려진 딸” … 통한의 입을 열다 


(새해기념)2019년도 근하신년


오늘의 볼프선동 : 최저임금을 인상하라

http://egloos.zum.com/lamit85/v/5329144

한 사회가 마녀사냥과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문제일수록
그 시점에서 기존에 알려져 있던 사실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  제3의 사나이 -
https://blog.naver.com/volf64/221430432544

최저임금 인상은 진리다. 어떠한 이견도 있을수 없다

30년 동안 일했는데 최저임금만 준 사장님을 봐라. 이런데도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안되나? 말같은 소릴 해라 좀.

내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8,350원이다.

그런데 최저임금만 올라가는게 아니다.

시간외 실비를 제대로 지급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유급 휴가를 쓰는 직원도 자꾸 늘어난다.

4대 보험도 자리를 잡으면서 자영업자들은 이것도 챙겨야한다.

슬그머니 안주던 주휴수당도 이제 제대로 줘야한다.

(정부가 개정안을 준비중이다. 개정된 뒤에도 주휴수당을 안주면 형사처벌이다)

이 와중에 최저임금이 크게 올랐다.

특히 자영업자들은 밀린 청구서가 갑자기 밀려드는 느낌이였을것이다.

기사 中

이게 최저임금 급격한 상승의 부작용이고 여기까지만 탓해야한다고 하는데 나는 의견에도 반대한다.

"밀린 청구서"는 당연히 지불해야할 대가일 뿐이지, 왜 이걸 부작용이라고 부르나?

생각해봐라.

내가 전기 요금 일년동안 안내서 밀린 일년치 청구서가 오면, 이건 부작용인가 당연한 대가인건가?

그동안 한국의 노동환경에 대한 개선이 1도 안 이뤄졌으니까 이제라도 급격한 개혁을 통해 팍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야한다.

이렇게 안하고 온건한 개혁만 요구하고, 온건한 개혁만 해왔기 때문에 30년동안 일했는데 최저임금만 주는 저런 병신같은 사업체가

떵떵거리면서 사는거다.

기업가 정신?

지랄하고 있네.

기업가 정신이 뭔가?

아랫 사람을 착취해서 최대 이윤을 올리는 것이 기업가 정신이다.

무슨 신사적이고 공익적인걸 바랬나?

기업가들의 사전에 그런건 없다.

기업가들의 사전에는 첫페이지가 최대 이윤이고 마지막 페이지도 최대 이윤이다.

"기업가 정신"은 "양아치 정신"이다.

이러면 반론이랍시고 유한 양행이야기 한다.

그래, 유일한 박사님이 대단한 분이긴 하지.

그러나 유일한 같은 천만명의 기업가중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사람만 기다릴순 없잖은가?

법과 규제를 통하여 양아치 같은 기업가들을 "강제로 " 무릎 꿇리면 "강제로" 유일한 박사님을 "양산"해낼수있는데

왜 자율에 맡겨야하는가?

두줄 요약

큰 정부는 절대선, 작은 정부 절대악!!

기업가들은 양아치다! Fuck 야경국가!


나의 생각

최저임금을 올리면 기업들은 인건비 부담으로

고용을 안하고 망한다.

기업들이 고용안하면

노동자들은 뭘로 먹고사는가

볼프 너는 문재인 정부 시작되어서 살림살이 나아졌니?



최저임금에 동의하는건 루리웹 유저들처럼 현실감각 떨어지는

반일오덕들이다



(참피) 징용실장










四葉
若葉



E섬에는 실장석 공장이 있었다.



이 섬은 육지와 연결되어있었다.



그 섬의 실장석 공장은 대동아 기업(사장 도죠 히데아키)에서 세웠다.



이 공장의 실장석들은 보건소, 식용실장 공장의 폐석들중에서도 양충들만 뽑아서 데려왔다.



그녀들의 배설물로 비료를 만드는데 실장석들은 효율이 떨어졌지만



실장석이 직접 만드는 비료라는 홍보때문에 매우 매우 잘 팔렸다.



36개월간은 그렇게 잘 운영되었다.



하지만 맥카사 기업과 소송으로 공장이 넘어갔다.



그러던중 A시의 실장석 애호파 의원들의 당선으로 애호정책이 시작되고



실장석 노동금지 정책으로 E섬의 공장도 폐쇄되어야했다.



3개월간 운영하던 맥카사는 철수하게 되었다.



E섬의 실장석들은 혼란에 빠지고 서로가 서로를 죽여댔다.



한편 애호파 시의원들은 E섬의 실장석들이 걱정되어서



그녀들에게 물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애호파 시의원들은 E섬 실장석 수뇌부와 함께 회의를 했다.



E섬 실장석 보스 : 우리들은 인간들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데스. 갑자기 우리들을 버리다니 심한 데스



시의원 : 안타깝구나. 우리들이 물자를 지원해주면 좋을거 같다



E섬 실장석 보스 : 해열제, 방한용품, 위생용품, 실장푸드...



수뇌부는 인간들이 준 물자를 모두에게 나눠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두에게 나눠주면 강도 사건이 일어나기때문이다.



서로 서로의 물자를 강도질하려는것이었다.



결국 E섬의 치안을 강화하는 치안부대 육성에 쓰기로했다.



그뒤



실장석들의 새로운 보스가 탄생했다.



그녀들은 E섬 실장석 사회 발전을 위하여 인간들에게 물자를 받기로 했다.



새로운 보스 : 우리들을 버린 대가를 달라고 하자



보스의 부하 : 저번에 받은 데스



새로운 보스 : 그건 지난 정권이 멋대로 받은 데스. 우리들의 동의가 없었던 데스



실장석들은 E섬을 지키는 군인들을 통하여 애호파 시의원들을 만나기로 했다.



회의장소, 이 곳은 E섬과 육지의 경계였다



새로운 실장석 수뇌부 : 인간씨, 우리들을 버린 대가를 주는 데스



시의원들 : 저번에 줬단다



새로운 실장석 수뇌부 : 그건 지난 정권이 멋대로 받은 데스



시의원들 : 아니지, 너희들은 지난 정권의 권리를 이어받았으니 책임도 이어받은거지. 그건 너희 내부의 문제야.



더이상 보상을 줄수없어



하지만 시의원 1이 그녀들에게 보상을 다시 주자면서 돌아가자고 한다.



다른 의원들이 반대했지만 시의원1은 마구 주장했다.



그러면서 차에 내려서 수류탄(?)을 외치며 물건을 던졌다.



그 순간, 실장석들은 함정들을 작동시켜서 석궁의 화살이 발사되고(빗나갔다), 그물 포획 장치가 작동되고(1명도 못 잡았다)



수뇌부는 시의원 1이 던진 물건을 받았으나... 주먹밥이었다.



당황하는 그녀들에게 시의원 1이 진짜 수류탄을 던졌다.



(애호파 시의원들은 수류탄같은 화기 소지를 특별허가 받았다)



 실장석 수뇌부를 수류탄 공격에 모두 끔살되었다.



시의원 1은 돌아가서 차를 직접 몰았다.



시의회



시의원 1은 실장석 수뇌부들이 인간들에게서 물자를 뜯어내려 했으며 그게 실패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시의원들을 공격, 인질로 잡으려했던거 같다고 말했다.



분노한 시의원들은 시장, 시의회를 부추겼으며 군부대가 E섬을 공격, 실장석들을 몰살시켰다한다







일본 만화가 이시카와 큐타 별세

漫画家の石川球太さんが死去(共同通信) - Yahoo!ニュース

 https://headlines.yahoo.co.jp/hl?a=20181228-00000069-kyodonews-cul



작품은 

소년 케냐(少年ケニヤ)

아왕(牙王)

이 있다. 향년 78세

지병으로 별세했다




강우규 판결문

번역된 판결문 - 독립운동사자료집 11 : 의열투쟁사자료집

판결 대정(大正) 9년 형상(刑上) 제58호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原面) 영덕리(靈德里) 68번지 재적(在籍)

중국 길림성(吉林省) 요하현(饒河縣) 신흥동(新興洞) 거주

농업

피고인 일명(一名) 찬구(燦九) 강우규(姜宇奎) 66세

우(右) 폭발물단속벌칙위반 피고사건에 관해 대정 9년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이 선고한 판결에 대해 피고인으로부터 상고신립(上告申立)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총동부 검사 초장임오랑(草場林五郞)의 의견을 들어 좌와 같이 판결한다.

주문

본건 상고(上告)는 이를 기각한다.

이유

상고 취의(趣意)는 본 피고인은 살인피고사건에 대해 대정 9년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의 판결을 받아 대정 9년 4월 28일 상고를 신립하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취의서(趣意書)를 제출한다.

(1) 피고의 행위의 목적은 본 피고인은 조선민족 2천만 동포를 대신하여 목숨을 걸고 국권의 회복과 독립을 전취하려는 데 있다.

(1) 신임(新任)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살해하려 한 것은 전(前) 총독 장곡천(長各川)은 조선에 재임함이 다년에 이르러 조선 사정에 정통하고, 선일동화정책(鮮一同化政策)을 실시하여, 통치하려고 힘써 왔으나, 작년 3월 내외지(內外地)에 산재하는 조선 2천만 인민이 일심동의(一心同意)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 도륙(屠戮)당하는 자 몇 천, 몇 만에 이르렀으나 사방(四方)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사그러지지 않음은 그 국민성의 됨됨과 그 열성(熱誠)의 도(度)가 그로 하여금 도저히 조선민족의 통치는 불가능함을 깨닫게 하여 단연 사직(辭職)코 귀국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임(新任)총독 재등실(齋藤實)은 도대체 어떤 자이며, 무슨 성산(成算)으로 내임(來任)한 것인가? 이 신임총독 재등실의 내임은 실로, 천의(天意)를 배반하고 세계의 일반 대세(大勢)인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와 인도정리(人道正理)로써 성립된 평화회의(平和會議)를 교란시키고, 하느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誡命)을 범하여 조선인 2천만을 궁지에 몰아넣어 그들의 어육(魚肉)으로 삼으려 할 뿐만 아니라, 이른바 대일본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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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폐하(天皇陛下)는 성덕(聖德)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천의(天意)에 순종하고 세계 대세인 평화회의에 동의하여 신임총독 재등실(齋藤實)에게 칙명을 내려, 그 명령 중에 동양의 대세(大勢)를 영원히 보호하라는 성지(聖旨)를 볼 것 같으면, 동양 대세의 보호는 평화에 있고 분쟁을 하지 않는데 있는 것으로 인정되며, 동양 3국의 평화 성립을 교유(敎諭)하였다.

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임총독 재등실은 비기(肥己)의 욕망을 품고 총독의 직명(職名)에 눈이 어두어 성지(聖旨)를 위배하여 분쟁을 유일의 능사(能事)로 삼아, 동양평화의 대세를 영원히 보호해야 할 평화의 서광(曙光)을 발휘치 못했다. 그 죄의 중대함을 무엇에 비길까! 그야말로 칙천(則天)과 세계에 대해서는 죄인이요, 자국(自國)에 대해서는 역신(逆臣)임은 물론, 조선에 대해서는 간적(奸賊)이요 동양의 악마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악마를 잡아 죽여 온 세계에 내돌려 동양의 흉적(凶賊)의 증거로 삼고, 엄격한 대일본국(大日本國)에 이같은 인류마종(人類魔種)이 다시는 생육(生育)치 못하게 하며, 또 그와 같은 명의(名儀)를 띤 자가 태평양을 넘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1) 폭탄물(爆彈物)을 어느 러시아인으로부터 몰래 매매할 때, 언어(言語)가 통하지 않아, 그가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는 것을 보고 사용법을 알았다. 다만 개인을 목표로 했을 뿐, 폭탄물이란 것을 전연 모르고 사들였으며, 러시아 국경에서 경성(京城)까지 들어오는 도중, 어느 누구에게 보이거나 서로 문답(問答)한 적이 없음은 심증(心證)의 사실로서 조금의 허위도 없다.

(1) 각 법원에 있어서 조사(調査)시, 그대는 다년간 러시아에 있었는데, 왜 폭탄의 명칭과 그 위력을 몰랐느냐고 물었으나, 이 물품은 시장에서 방매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가격을 알 수 없고, 또 군인이 아닌 본인이 어떻게 군물(軍物)의 형태니 위력을 알 수 있겠는가? 오직 유럽전쟁 때 어떤 신문지상에서 보자니, 독일 국민이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 적국의 도시 각처에 투하하여 도륙(屠戮)하였으므로, 영국 런던에서는 고층건물의 상대(上臺)를 파괴하는가 하면 밤에는 전등을 꺼버린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본인의 생각에 폭탄이란 것은 도기로 만든 수분(水盆)이나 아주 큰 호박[南瓜]과 같은 것이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어린이 주먹만한 쬐그만 것으로서는 사람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으로만 여겨왔다. 그리하여 폭탄의 위력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이 물품이 폭탄이라는 것도 남대문역(南大門驛)사건 후의 며칠자 신문지상에서 읽고 비로소 안 것이다. 그러므로 남대문역에서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기까지도 개인(個人)을 목적으로 투척한 것이 사실이며 거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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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경남도 원산부(元山付) 광석동(廣石洞) 1번지 최자남(崔子男)의 집에 묵으면서 한밤중에 주인 최자남을 일으켜, 본인의 이번 거사(擧事)는 독립운동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신임총독을 살해하기 위해 폭탄 1개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그 폭탄을 최자남에게 보인 뒤 그 폭탄에 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은 물론 본인이 하는 범사(凡事)를 동모(同謀)할 것을 당부하고 전기 폭탄을 그에게 맡겼다는 것은 근거 없는 말이다. 본인 자신의 동품(同品)의 명칭도 위력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남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최자남은 원래 무학무직자로서 잡화, 짚신 등을 파는 장사치임은 이미 아는 바로서 이와 같은 모험 비밀에 관한 대사(大事)를 어떻게 경솔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누구나 생각있는 자 같으면 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은 본인 손수 그 집의 은닉처에 숨겨놓고, 그 집을 떠날 때는 의복 속에 깊이 감추어 누더기로 꽁꽁 묶어 풀지 못하게 주의시키고는 주인 최자남에게 맡겼다. 본 피고는 상경(上京)하여 신임(新任)총독 내임(來任)의 일자(日字)를 소상히 알은 후 다시 돌아가, 최자남에게 맡겨 놓은 누더기 보를 찾아 다시 상경(上京)한 사실은 틀림없다. 그러나 동범인 최자남은 형장(刑杖)을 이겨내지 못해 횡설수설 허황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1·2심 법정에서 자백(自白)을 했다. 그가 말하기를 잠시 동안이나마 보명(保命)을 꾀하려고 무고(誣告)를 했을 뿐으로 실은 강우규(姜宇奎)의 독립운동의 설(說) 또는 폭탄물(爆彈物)에 대해서도 전혀 목적한 일이 없고, 오직 의복에 싼 보를 맡겼을 뿐, 강우규가 경성(京城)에서 돌아왔을 때 내준 것뿐이다. 이외에 그에게 조석(朝夕)을 제공한 것뿐으로 그 밖에 아무런 죄도 없다. 따라서 소인(小人)의 죄도 용서될 것이 분명한 바, 재판장께서는 관대한 처분이 있기를 바란다고 변명함을 들엇다.

그리고 최자남이 피고로부터 폭탄물을 맡을 때,

(1) 신임총독 재등실(齋藤實)이 착임(着任)하는 당일, 본 피고인이 폭탄을 투척한 것은 실로 신임총독 재등실을 살해하려는 것으로 그 밖의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곁사람들의 살상(殺傷)은 이것을 비유한다면 총독 재등실의 연회 때, 본인으로부터 호주(好酒) 한 병을 선사받았으나 내 자신 마시지 않고 참석한 사람에게 주어 그가 취한 뒤, 누구의 술을 마셨느냐고 사람이 물으면 이 자는 총독의 술을 마셨다고 대답하리라. 이와 같이 곁사람들의 살상(殺傷)이 본인 피고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것뿐만 아니라, 본건에 대해 재등실과 동부인, 그리고 남대문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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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상된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그와같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해결은 분명한 것으로 신문지상에 게재된 그대로라 하겠다.

(1) 옛말에도 있드시 피고인은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한 적이 없고, 사사건건(事事件件)에 한결 같은 변명을 하고 있다. 각 법원에서는 조서(調書) 중의 사실을 고찰치 않고, 황언무고(詤言誣告)임이 분명한 최자남의 가언(假言)을 증거로 하여 논고(論告)하였을 뿐만 아니라, 율법(律法)에 관해서도 죄명(罪名)은 하나이나 형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 각종이 있는 법이다. 범죄의 경중(輕重)에 있어서도 물론이지만 본 피고인이 목적하는 죄많은 신임총독 재등실은 현재 살이 있는데도 이일 저일 제쳐놓고 본 피고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이를 어찌 공의(公議)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본인이 여기에 신립한 것은 사실 죽어야 한다면 사형도 불사(不辭)하나 공의(公議)에 따른 심판을 보자는 것이 그 이유라는 것이다.

그리하나 원심(原審)은 원판결문 소게(所揭)의 각 증거에 의해 피고자 조선총독 재등실을 살해할 것을 계획하고 원판결과 같이―폭탄의 안전핀을 뽑고 폭탄을 파열시킴으로써 재등이 타고 있는 마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상할 결과를 가져올 것을 예견하는 동시 그 주변에 사람들이 밀집(密集)해 있는 것을 알면서 30척 내외의 거리에서 마차 위에 타고 있는 총독의 가슴을 겨냥하여 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폭탄은 마차 앞쪽 약 7보(步)쯤에 낙하하여 큰 폭음과 더불어 폭탄은 파열하여 탄편이 사방으로 날아 그 중 몇 개의 탄편은 마차에 부딪치고 그 중 한 개가 마차 뒤쪽을 관통하여 총독이 허리에 찬 검대(劍帶)를 손상(損傷)시켰을 뿐, 그 몸에는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그러나 비산(飛散)한 탄편으로 말미암아 그 근처에 있던 귤향귤(橘香橘)과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이 중상을 입은 후 사망하기에 이르고 그 밖에 판시(判示)와 같이 각 피고인은 중경상을 입었으나 죽지는 않은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서, 이 사실에 따르면, 피고의 소위(所爲)는 원심 적용의 법조(法條)에 해당하는 범죄를 구성하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원심이 이 법조를 적용하여 피고를 사형에 처한 것은 상당(相當)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논지(論旨) 중, 피고가 전임(前任) 총독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는 조선통치의 불가능함을 인정코 사직 귀국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신임총독 재등실이 내임(來任)한 것은 세계의 대세(大勢)인 민속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와 인도정리(人道正理)를 요지로 하는 평화회의 기도(企圖)를 교환시켜 조선인 2천만을 궁지에 몰아넣어, 동양의 대세에 배치(背馳)하고 평화의 서광을 억제하려는 자(者)이므로 조선 2천만 민족을 대신하여 신명(身命)을 걸고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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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에게 폭탄을 투하한 것이라고 진변(陳辯)하고 있다. 이 점은 피고가 자기의 사실을 말하고 자기의 의견에 따라 자기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데 불과하므로 그 이유는 없고, 피고가 자기가 사용한 폭탄이 다만 한 사람을 살해하는데 족할 뿐, 많은 사람을 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몰랐고, 이것을 투척한 것은 다만 총독 재등실을 죽이려고 한 목적이었다. 피고가 그 정(情)을 밝히고 폭탄을 최자남(崔子男)에게 맡겼다는 본인의 공술은 허황(虛謊)한 언설(言說)이다.

그럼에도 원심(原審)은 본인의 공술을 채택하여 판시(判示) 사실을 인정한 것을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점은, 자기의 사실을 진술하고 원심의 직권(職權)에 속하는 증거의 취사(取捨)와 사실인정을 비의(非議)하는 것으로 이유가 없다.

피고가 총독 외에 사람을 죽일 의사가 없었다는 취지의 변명하는 점은, 비록 피고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원 판시와 같이 피고가, 폭판의 파열로 총독이 타고 있는 마차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살해의 결과를 초래할 것을 예견하고, 또 그 변두리에 많은 인파가 밀집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 차 위에 있는 총독을 겨냥하여 폭탄을 투척코, 그 파열로 인해 타인을 살상시킨 이상, 그 결과에 대해 판시(判示)와 같이 죄책(罪責)을 져야 함은 당연하며, 그 결과의 발생을 희망치 않았다고 하는 이유로 죄책을 회피할 수 없음은 물론이므로 논지(論旨)는 이유가 없다.

그리고 재등 총독이 아직 생존해 있는데 사형에 처한 것은 실당(失當)이라고 논한 점은, 비록 총독의 생존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피고의 판시(判示)와 같이 피고가 사람의 인체(人體) 생명을 해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폭발물을 사용하여 살인기수(旣遂)미수의 소위(所爲)가 있는 이상 원판시 법조를 적용, 사형에 처한 것은 부당하다 할 수 없으므로 논지(論旨)는 원심의 직권(職權)에 속하는 형(刑)의 양정(量定)을 비의(非議)하는 것으로서 그 이유가 없다.

상고 추가(追加) 취의(趣意)는―본 피고인의 거듭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앞서 문견(聞見)한 바를 여기서 앙고(仰告)하려는 것이다. 즉 제1심 법원에 있어서 조사가 끝난 뒤 법원장에게 이 법원은 조선총독부의 명령에 따라 설립한 것인가? 또한 대일본제국 천황폐하의 칙령(勅令)에 따른 것인가를 물었던 바, 재판장은 조선총독도 관계 없고, 천황폐하도 상관치 않는다고 대답했다. 본인은 그러면 하늘이 명령하는 법률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가 하고 묻자, 재판장은 하늘도 우리에게는 관계없고, 우리의 법률은 독립하여 성립된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총독이나 황족(皇族)이라 하더라도 죄가 있으면 물론 치죄(治罪)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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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그래래 총독 재등실은 호출(呼出)해 줄 것을 요구하자, 재판장은 그것을 검사국(檢事局)의 고소(告訴)가 없이는 어렵다고 하므로 본인은 검사에게 구두(口頭)로 고소하고, 조서(調書)에 기록까지 하여 열석(列席)한 검사에게 신립(申立)하였던 바, 재판장이 총독에게 무슨 범죄가 있었느냐고 묻기에, 본인은 그러면 총독의 죄상을 여러 가지 매거(枚擧)해 주리라 답하자, 그들은 법관으로 피고의 신립에 대한 시비(是非)를 분명히 판단해 줘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답도 없이 폐정퇴석(閉廷退席)함은 이것을 법관의 예(禮)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실로 억울한 처사이다.

그리고 재판장으로부터 천황폐하와 총독에게 관계가 없기 때문에 황족 또는 총독에게 죄가 있을 때는 물론 치죄한다고 하면서 본인의 호출(呼出)의 요구에 대해서는 이렇듯 묵살함은 언사부동(言辭不同)이 아닌가. 이것뿐만 아니라 또 재판장은 하늘과 천황폐하는 우리 법률에 대해서는 도시 관계가 없으며, 법률은 이것이 독립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하나 우로(雨露)의 아래, 성덕(聖德)의 아래에 있는 국민에게 어찌하여 이런 차별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야 말로 도덕이라 할 수 없고, 의리(義理)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실로 억울한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1) 본 피고인에 대한 복심법원의 취조(取調)를 끝내고 논고까지 행한 후, 재판장으로부터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이미 망한 나라를 나라라 하지 말고, 일본의 인민이 된 이상 일본국에 충성을 다하라는 설이었으나, 이것이야 말로 어린애에게 할 말이지, 어른에 대해서 어찌 이런 말을 지껄일 수 있겠는가? 무릇 그 조국을 위해 거사(擧事)하는 자 자고(自古)로 어찌 본인뿐이겠는가? 예를 들어 서양제국에서는 워싱턴·나폴레옹·비스마르크와 같은 자들이 있고, 동양제국에서는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자 없지 않다. 이등박문(伊藤博文)과 같은 자도 있어, 그 소국(小國)을 위해 고신경영(苦心經營)하고 있는데도, 재판장 말과 같이 전기 몇 분이 만일 자기 나라를 위해 거사를 하지 않고, 적국(敵國)에 복종하고 말았다면 그 나라의 인민은 적의 노예됨을 어떻게 모면할 수 있었으며, 그 국가들이 오늘과 같은 세계 1등국이 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전감(前鑑)이 된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국가의 흥망과 시세(時勢)의 변천은 고금의 상사(常司)이다. 아아, 저 복심원법원장은 일시 목전(目前)만을 생각하고 전사후사(前事後事)와 제나라를 위해 고심경영(苦心經營)한 이등박문의 일도 생각지 않고 있다. 자기 나라를 위해 전력하려는 본인에 대해 이와 같이 멸시 천사(蔑視賤辭)로써 책망함은 그것을 도덕의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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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 말을 듣자 실로 슬픈 감이 우러나는 한편 단,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라 하겠다.

(1) 위대한 동양이여! 사랑스런 동양이여! 그 대세(大勢)의 영원한 보호를 만인 중에서 집권(執權)할 자, 혹은 인민인 자, 어떻게 이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또 주의(注意)의 눈길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동양의 대세의 영원한 보호가 어디 있느냐 하면, 비록 말을 갓 배우는 젖먹이 아이라 하더라도 분쟁(紛爭)에 있지 않고 평화에 있다고 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동양의 평화를 어찌 급선무라 하지 않겠는가. 한번 눈을 크게 뜨고 그들 백인(白人)의 처사를 주시하라. 세계 최대의 대전(大戰)을 중지하고 평화회의를 성립시킨 후 대국이니, 5대국이니 하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가 모두 소멸하고, 모모 3국은 동맹을 맺고 안연(晏然)한 것을 보면 그 속뜻은 반드시 지방 관렴(地方觀念)과 인종 관념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대일본제국 천황폐하는 이것저것을 깨달은 뒤 동양의 대세를 영원히 보호해야 한다는 어지(御旨) 중 동양의 평화도 포함할 것을 훈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 무도덕, 무의리(無義理)·무륜(無倫)·무애(無愛)한 악마 재등실은 천의(天意)에 위배하고 성지(聖旨)에 배신하여 태평양을 건너와 여전히 분쟁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른바, 경찰법률로 조선 인민에게 그물을 치고 그 강산(江山)은 인민의 감옥으로 화했으니 이 강산에 사는 자 어떻게 악감정을 품지 않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애국열(愛國熱)과 배일열(排日熱)은 날로 높아가고, 어느 만큼 극도의 상태에 이르는가를 한 여인의 말을 들어도 알 수 있다. 즉 그 여인의 말인즉 일본놈의 말소리만 들어도 뱃 속에 들어 있는 태아(胎兒)가 요동을 한다고. 이 말이야말로 인민 중에 절담(絶談)이라 할 수 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원래 당당한 4천년의 역사국으로 예의를 지켜 내려온 2천만의 민족이 악마와 같은 그들 무리에 휩싸여 그들의 동류(同類)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결코 우리 동포 2천만은 한사람이 마지막 남을 때까지 싸우더라도 국권회복과 자유독립을 전취할 때까지 혈실동맹(血心同盟)할 때 본인도 투표원(投票員)이 될 것이다.

또 동양의 원국(源國)인 저 중국에 대해 말하더라도 각 신문지상에서 항시 보는 바와 같이 배자(排字) 밑에는 일자(日字)가 붙는다. 따라서 배척은 어찌 심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무릇 동양 3국을 말하자면 무이(無異)의 국가로서 같은 한 집의 형제이다. 만일 한 국가에 분쟁이 생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일어날 것이며, 한 집안에 분쟁이 생기면 그 집안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어떤 자(者)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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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인(聖人)의 말로서 혹은 형제가 우애가 없어 화목치 못하면 반드시 외모(外侮)를 받는다는 말은 중국 성인(聖人)의 말이다. 그러한데 어찌 오늘날 동양 평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배기겠는가!

다 알다시피, 동양 3국 중 대 일본은 세계의 대국(大國)으로서 1등국이다. 동양의 신문명(新文明) 선진국가로서 그 지위는 어떠한가? 원컨대 고등법원장이여! 고등법원장이여! 동양대세의 장래와 장래의 이해(利害)를 심사(深思)하고, 저 우매(愚昧)한 신총독 재등실에게 충고하노니, 이미 획득한 그대의 영광에 만족하여 부족이 없으니 구도봉전(久島逢箭)에게 고한다.―신속히 고국(故國)으로 돌아가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정부 당국자들로 하여금 동양 분쟁의 기틀을 거두고, 평화회의를 성립시켜 동양 3국을 정족형(鼎足形)을 이루고, 견고하게 버텨서서 완전한 정책과 완전한 사업을 일으킨다면 그 누구가 감히 이를 얕보며, 그 누구가 감히 이것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만일 이와같이 된다면, 대일본은 3국 중에 패국(覇國)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때 그 영광은 어떤 것이며, 그 지위는 어떻겠는가! 일본인의 언설(言說)은 버리지 않겠다. 동양 대세의 장래에 있어 후회됨이 없도록 본인은 자국(自國)과 동포를 위해 자기의 신명(身命)을 희생코, 영혼으로 하여금 국권회복과 자유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소론(所論)과 같이 제1심 재판소가 총독 호출(呼出)의 신립을 허용치 않고, 또 원심재판장이 소론(所論)같이 유고(諭告)를 했다고 하더라도 본건 판결 수속에 하등의 위법을 야기치 않았다. 원판결의 당부(當否)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운위(云謂)할 이유가 없다. 그 밖의 논지(論旨) 중에는 누차 진변(陳辯)을 거듭한 바 있으나 이것은 정치·도덕에 관한 논의(論議)로서 추호도 상고(上告) 적법의 이유가 될 만한 것이 없다.

상기 설명과 같이 본건 상고(上告)는 이유가 없으므로, 따라서 형사소송법 제285조에 의해 주문(主文)과 같이 판결한다.


판결 대정(大正) 8년 형공(刑公) 제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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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原面) 영덕리(靈德里) 68

중국 길림성(吉林省) 요하현(饒河縣) 신흥동(新興洞)

농업

통칭 강찬구(姜燦九)

강우규(姜宇奎) 66세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상동(上洞) 83번지

함경남도 광석동(廣石洞) 1번지

잡화상 최자남(崔子南) 43세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 안주면(安州面) 건인리(建仁里) 313번지

경기도 경성부(京城府) 안국동(安國洞) 79번지 윤희식(尹喜植) 방 거주

고용인(雇傭人) 통칭 허일영(許一英)

허형(許炯) 27세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부내면(府內面) 문봉리(文峰里) 261번지

경기도 경성부 안국동(安國洞) 96번지 김종호(金鍾護) 방

학생 오태영(吳泰泳) 26세

우자(右者)에 대한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피고사건에 관해 당원(當院)은 심리(審理)를 끝낸 후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피고 강우규(姜宇奎)를 사형에 처한다.

피고 최자남(崔子南)을 징역 3년에 처한다.

피고 허형(許炯)을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피고 오태영(吳泰泳)은 무죄

압수물건 중 증제(證第) 1호, 증제 4호 내지 증제8호, 증제27호의 각(各) 탄편(彈片)은 이를 몰수하고 그 나머지는 각 소유자에게 환부(還付)한다. 공소 재판비용 금 50원은 이것을 5분(分)하여 그 3을 피고 강우규가 부담하고 나머지를 피고 최자남, 피고 허형이 각각 1씩 부담한다.

이유

피고 강우규는 장로파(長老波)기독교 신자로서 명치(明治) 43년 한일(韓日)합병이 이뤄지자 크게 여기에 분개하고 조선 내에 사는 것을 달갑게 생각지 않던 끝에, 그 익년 명치 44년 봄 재적지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原面)을 떠나 중국 북간도(北間島) 도구(道溝)로 이주(移住)했다. 이에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부(東部) 시베리아 연해주(沿海州), 흑룡강(黑龍江) 등 각지를 방랑하다가 대정(大正) 6년 현 주소인 중국 길림성(吉林省) 요하현(饒河縣) 신흥동(新興洞)의 조선인 부락에 주거(住居)를 정한 뒤, 이곳에 사립(私立) 광동(光東)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인 자제(子弟)의 교육에 종사했다. 이 동안 항상 국권(國權)을 회복하고 조선을 독립시키고자 요망하여, 청년 자제에 대해 그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노인단(老人團)에 가맹(加盟)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대정(大正) 8년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일파의 조선독립 선언(宣言)에 의해 조선 각지에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소요(騷擾)가 빈발하자 피고 강우규는 그 해 4월 거주지 신흥동(新興洞)에서 자기가 앞장서 시위운동을 감행하고, 조선 내의 그 후의 정황(情況)을 엿듣기 위해 그해 5월말 노령(靈領) 블라디보스톡 선인(鮮人)부락 신한촌(新韓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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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조선총독 장곡천(長谷川)이 그 직을 물러나 일본으로 귀환하는데 후임총독으로 누군가가 내임(來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피고는 뜻밖에도 장곡천 총독이 다년 조선에 재임(在任)하여 조선의 사정에 정통한 나머지 선일동화정책(鮮日同化政策)을 베풀어 통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즈음 치열하게 일어나는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보고는 도저히 조선 통치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조선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단연 사직하여 조선을 떠나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슨 승산(勝算)에서 신임(新任)조선총독은 내임(來任)한단 말인가! 이것은 실로 세계의 대세(大勢)인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위배되며 인도(人道)를 무시하고, 동양 평화를 교란하고 조선 2천만 동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원적(怨敵)이다. 따라서 본인은 목숨을 걸고 신임조선총독을 살해하여 조선인의 열성을 표명하는 한편 내외(內外)의 동정(同情)을 얻어 조선독립을 승인받고자 했다. 그리하여 일단 거주지인 신흥동(新興洞)으로 되돌아와, 수개월 전에 동부 시베리아 우스리 철도선(鐵道線) 청룡역(靑龍驛)부근에서 어느 러시아인(人)으로부터 그 사용법까지 들은 뒤 사들였던 주철제(鑄鐵製) 영국식 예화(曳火) 수류탄(手榴彈) 한 개를 사용하여 신임조선총독을 살해할 것을 계획하곤 재차 블라디보스톡으로 나왔다. 그리고 폭탄을 헝겊에 싸서 가를 깁은 뒤 양끝을 허리띠에 걸어 두루마기 밑 사타구이 사이에 드리워 이것을 숨기고, 그해 6월 11일 그곳을 떠나는 기선(汽船) 월후환(越後丸)에 승선, 그달 14일 아침 원산부(元山府)에 상륙하여 동부(同府) 본정(本町) 5정목 42번지 원일여관(元一旅館)에 투숙했다.

그 익일 15일, 동부(同府) 광석동(廣石洞) 노상에서 옛날 시베리아에서 알게 된 피고 최자남(崔子南)을 만나 그날부터 동부 상동(上洞) 183번지 최자남의 집에 기숙하면서 휴대한 폭탄은 그 집 마루청 천장 뒤에 숨겨둔 채, 매일 신문을 통해 신임 총독이 누구며 언제 내임(來任)하는가를 주시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17일경 피고 최자남은 동부 황석동(黃石洞) 1번지 신축 가옥으로 이전하게 되어 피고 강우규도 함께 그곳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그날 밤 피고 강우규는 피고 최자남을 깨워 일으켜, 자기는 독립운동을 위해 귀선(歸鮮)했다는 것, 그 운동에 필요한 폭탄 한 개를 휴대하고 왔으며, 이 폭탄의 위력은 6연발 권총의 24배에 값어치하여 밀집한 군중에게 던져 능히 100명을 살해할 수 있음을 말해 주었다. 동시에 그 사용법을 가르쳐 준 한편, 숨겨 두었던 폭탄을 꺼내어 최에게 적당한 장소에 감춰 줄 것을 부탁했다.

피고 최자남은 피고 강우규가 이 폭탄을 사용하여 조선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려는 사실을 알면서 피고 강우규를 위해 폭탄을 숨겨줄 것을 승인한 후 이것을 받아 건넌방 부엌 벽장 위에 숨겨두었다.

피고 강우규는 8월 4일 원산부에서 알게 된 피고 허형(許炯)과 함께 원산을 출발, 도중 석왕사(釋王寺) 영월여관(映月旅館)에 일박 후, 익 5일 경성(京城)에 도착하여 허형의 소개로 동부 안국동(安國洞) 96번지 김종호(金鍾護) 집에 투숙하면서 형세를 엿보건대, 조선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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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천(長谷川)은 이미 7월 5일 경성을 떠나 동경(東京)으로 갔으며, 8월 초순 사표를 제출할 예정이며, 후임조선총독은 해군대장 재등실(齋藤實) 임을 신문보도를 통해 순차적으로 전해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임조선총독의 취임을 기다려 예정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그달 17·18일경 원산(元山)으로 되돌아가 앞서 최자남에게 맡겨두었던 폭탄을 받아 경성(京城)으로 되돌아와 김종호의 집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정과 같이 그달 12일부로 조선총독의 임명(任命)이 발표되고 근일 중에 부임한다는 신문보도가 있고, 동시에 신임조선총독 재등실(齎藤實)의 사진이 지상(紙上)에 게재해 있음을 보았다. 그럼으로써 점점 동총독을 살해하는데 필성을 기하기 위해 그달 20일경 다시 원산(元山)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최자남을 통해 앞서 그 누군가가 폭탄 2개를 장치(藏置)해 두었다는 정보를 들었다.

동부 신촌동(新村洞) 51번지 한흥근(韓興根)을 만나 폭탄 1개를 교부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해 두고, 경성으로 되돌아가자 신임총독이 급기야 9월 2일 경성(京城)에 착임(着任)한다는 기사가 나 있었다. 그런데 전기 안국동(安國洞)의 숙소는 남대문(南大門) 정거장에서 너무 거리가 멀어 거사를 하는데 불편함을 느끼고, 8월 28일 전기 정거장에 가까운 남대문통(南大門通) 5정목 60번지 여인숙 박영선(朴泳銑)의 집으로 옮겨, 매일같이 남대문 정거장 부근을 배회(徘徊)하며 정거장 출입구의 지형을 마음속에 익히고 있었다. 그달 31일 아침 안국동(安國洞) 79번지 윤희식(尹喜植)의 집에 피고 허형(許烱)을 방문하고 그로부터, 피고 최자남 발(發) 피고 강우규 변명(變名) 강영일 앞 아들이 왔으니 곧 오라는 암호(暗號) 전보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피고 허형을 길가에 불러내어 원산(元山)으로 가 최자남을 통해 한흥근(韓興根)으로부터 폭탄을 받아오라고 의뢰하였던 바, 피고 허형은 즉시 이를 승낙하여, 여비와 편지를 받아 그날 원산부로 가서 최자남을 만나 찾아온 내력을 말하자, 한흥근은 그 전날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익일 9월 1일, 공수로 되돌아와 피고 강우규와 정기 박영선(朴泳銑) 집 부근의 중국음식집에서 만나 원산의 실황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피고 강우규는 허형에게 자기가 따로 사용할 목적으로 폭탄 1개를 소지하고 있다고 하며, 이것을 비밀에 부칠 것을 간곡히 타일렀다. 그리하여 그 익일 9월 2일 오전 피고 강우규는 미리 바지 앞 부분에 명주 손수건의 한끝을 기워매고 이 속에 수류(手榴) 폭탄을 넣어 아래 끝을 접쳐 허리 뒤로 돌려 굳게 조아맸다. 그 위에 저고리와 모시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손을 찌르면 곧 폭탄을 꺼낼 수 있게끔 장치를 했다. 그리고 검정테 파나마 모자를 쓰고 가죽신을 신고, 손에는 양산과 타월을 쥔 채 숙소를 떠나 남대문 정거장 앞으로 갔다. 그리하여 급기야 계획대로 신임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살해의 목적을 달성하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자작(自作)의 시(詩) 1수를 읊고 용약 조용히 체포의 오랏줄을 받을 각오로 시각이 흐르기만 기다렸다. 그러는 중 하오 4시경부터 조선총독 환영을 위해 많은 거마(車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급기야 총독의 착경(着京)이 확실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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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되었다. 총독 승용마차를 물색하다가 마침 동 정거장 귀빈실(貴賓室) 입구 앞에서 이것을 발견하곤 폭탄 투척의 위치를 선택코, 귀빈실의 동북쪽 울타리 부근에 있는 다방(茶房) 입구 앞 군중들 속에 섞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오 5시가 넘어 동 정거장에 도착한 열차에서 신임 총독 재등실(齋藤實)은 부인(夫人)과 비서관 이등무언(伊藤茂彦)과 상호 전후하여 마차에 탔으므로, 피고 강우규는 사전에 본 바 있는 신문지상의 사진에 따라 틀림없음을 확인하는 동시 피고는 폭탄을 들어내 오른손에 잡고 왼손으로 타월을 이 위에 덮어 이것을 감춘 뒤 투척의 준비를 완전히 갖추었다. 그리하여 왼손으로 안전전(安全栓)을 뽑아 폭탄을 투척하면 작열하는 동시 마차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게 될 것을 예상하면서 약 13.4m 거리에서 마차 위에 타고 있는 조선총독 재등실의 가슴을 겨냥하여 투척했던 바 마차 앞 약 7보(步) 앞 지점에 떨어져 꽝하는 굉음과 더불어 이 폭탄은 파열하여 사방에 흩어지고 그중 몇 개의 파편이 조선 총독 승용마차에 맞아 그 중 한 개가 마차의 후방을 관통하여 조선총독 재등실의 요부(腰部) 대검(帶劍)을 손상(損傷)했을 뿐으로 그 신체는 아무런 피해 없이 무사하였다. 다만 날아흩어진 탄편(彈片)으로 그 주위에 있었던 대판(大阪)조일신문사 경성 특파원 귤향귤(橘香橘), 대판매일신문사 경성특파원 산구간남(山口諫男), 본정(本町)경찰서장 소모전십태랑(小牟田十太郞), 동서(同署) 경부 권오용(權五鎔), 동 순사 박정화(朴貞和), 종로경찰서 순사 안무정일(安茂政一), 동 박완식(朴完植), 조선신문사 기자 하원청태랑(河原淸太郞), 동 사진부원 구도행태랑(久渡幸太郞),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장 구보요장(久保要藏), 동국 운수과장 안등우삼랑(安藤右三郞), 동국 촉탁 야진요태광(野津要太郞), 육군소장 촌전신내(村田信乃), 경성일보사 사진판 무정연태광(武井延太郞), 미국인 W.B. 해리슨 부인(夫人), 고양경찰서 순사 박성팔(朴聖八), 순사 심광연(沈光淵), 동 백준기(白俊基), 도경부 김태석(金泰錫), 이왕직 사무관 이원승(李源昇), 조선총독부속(附屬) 이관중준(伊關重俊), 동부 고원 서전국길(西田國吉), 동 삼하삼남(森下三男), 동 산내호남(山內虎男), 경기도 순사 말광구이랑(末廣久二郞), 경성감옥 수업수(授業手) 야방을삼랑(野方乙三郞), 마부(馬夫) 가등순일랑(加藤頋一郞), 차부(車夫) 성대용(成大鏞), 동 근등구길(近藤龜吉), 동 암미무(岩尾茂), 동 박홍식(朴弘植), 동 엄관서(嚴寬瑞), 동 박재인(朴在仁), 동 황춘엽(黃春燁), 동 이백록(李百祿), 동 이장용(李長龍), 개성군(開城郡) 남면(南面) 후석리(厚石理) 농업 양창화(楊昌華) 등 37명에 중경상(重輕傷)을 입히고, 그 중에서도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은 좌대퇴부(左大腿部)에 뚫고 들어간 탄편(彈片)으로 인해 패혈증(敗血症)을 일으켜 그해 9월 11일 하오 2시 20분 사망하고, 귤향귤(橘香橘)은 복부에 뚫고 들어간 탄편으로 인해 장관(腸管)을 손상당해 복막염(腹膜炎), 폐렴(肺炎)을 일으켜 그해 11월 1일 상오 9시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피고 강우규는 폭탄을 투척하자마자 눈을 감고 천명에 따라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겠다고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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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는 순간 꽝 하는 굉음을 듣자 그와 동시에 눈을 뜨고 두루마기 자락을 걷어 올려 자작시(自作詩)를 고창하고 춤을 추려는데 조선총독 탑승 마차는 아무 이상 없이 진행하는 것을 보고 천명으로 목숨을 건진 것으로 알았다. 동시에 곁사람들이 피고 자신에게 아무런 주목하는 바 없는 것도 이것 역시 하늘이 피고의 생명을 보호해 준 것으로만 생각하고 유유히 그곳을 떠나 숙소 박영선 집으로 돌아와 9월 4일 다시 안국동(安國洞) 김종호(金鍾護) 집에 전숙(轉宿)하고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몸을 씻고, 그달 7일 피고 오태영(吳泰永)에게 의뢰하여 가회동(嘉會洞) 82번지 장익규(張翊奎) 집에 수일간 머물은 후, 다시 앵하동(櫻下洞) 임재화(林在和) 집으로 옮겨 그달 17일 그곳에서 체포된 것이다.

피고 허형(許炯)은 전기와 같이 피고 강우규의 의뢰를 받고 폭탄을 받아오는 심부름군으로서 원산(元山)으로 갔다가 동인(同人)이 아직 폭탄 1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있었으므로 남대문정거장 앞에서의 폭탄 투척자는 필시 피고 강우규라 믿고 9월 6일 김종호 집에 피고 강우규를 찾아가 은밀히 본인으로부터 9월 2일 남대문 역전 사건이 자기의 소행에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본인의 말이 폭탄이 하나뿐이라서 그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지만, 폭탄이 하나만 더 있으면 성공했을 것이라는 본인의 술회(述懷)를 듣고, 또 일체 발설(發說) 말라는 당부까지 들어, 이 사건 범인이 강우규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이것을 경찰관리에 고지(告知)하지 않았던 자(者)이다.

이상의 판시사실(判示事實)은,

피고 강우규가 당공정(當公廷)에서 진술한―

본인이 그 사정을 밝혀 피고 최자남(崔子男)에게 폭탄을 숨겨달라고 부탁한 점, 한흥근(韓興根)에게 폭탄 하나를 교부해 달라고 부탁한 점, 허형(許炯)을 시켜 폭탄을 받아오라고 원산(元山)으로 보낸 점, 9월 6일 허형에게 폭탄 투척자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밝힌 점,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 이외의 사람에게 상해(傷害)를 입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예견(豫見)한 점과 그 살상(殺傷)의 결과적 사실을 제외한 이에 부합되는 자백(自白).

피고 최자남의 제1회 예심신문(豫審訊問) 조서 중―

판시 사실 중, 피고가 관여한 부분에 대해 이에 부합하는 자백을 한 취지의 기재(記載).

피고 허형의 제1회, 제2회 예심신문 조서 중―

판시 사실 가운데 피고가 관여한 부분에 대해 이에 부합되는 자백을 한 취지의 기재(記載).

증인 대야차랑(大野次郞) 제1회 예심신문 조서 중―

본인은 9월 2일 재등총독(齋藤總督)의 착경(着京)을 구경하러 가 다방 앞문 오른쪽 홈통(雨桶) 있는 주석(柱石) 위에 발을 걸치고 구경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비스듬히 인력거가 줄지어 서있고, 옆쪽, 즉 다방 입구 앞에는 본인의 위치에서 5.6m 거리에 10수명의 내선인(內鮮人)이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총독이 귀빈실에서 나와 마차에 올라 5.6m쯤 달렸는가 할 무렵, 수십 명의 구경꾼이 서 있는 오른편 길 위 3.4척(尺) 거리에 총독이 타고 있는 마차 쪽으로 고무공 크기만한 까만 물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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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가는 것이 보였고, 그것이 담배연기 정도의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보인 듯하다.

이 검은 물건은 총독의 마차 뒤에 떨어져 2·3초 뒤 폭음이 일어났으며 그 폭음과 함께 본인은 미끄러져 인력거 옆에 넘어졌다가 즉시 일어났다. 그때 총독의 마차는 정거장 입구 앞을 달리고 있고, 전기 십수명의 구경꾼들이 놀라 당황하면서 정거장 입구쪽으로 피해갔다. 그때 한 사람의 조선인은 유유히 늘어서 있는 인력거 뒤를 걸어서 정거장 입구 쪽으로 옮겨갔다. 그 조선인의 오른편 손에는 무언가 가지고 있었고,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제법 자란 백발이 성성한 55·6세즘 되는 당당한 사나이였으나 노동자풍(風)은 아니었다. 본인 그 폭탄을 던지는 손은 보지 못했으나 조선인의 모습이 수상쩍어 그가 범인이 아닌가 생각되어 그를 미행(尾行)하여, 정거장 입구에서 제복을 착용하고 수염이 짙게 자란 일본인 같이 보이는 순사더러 체포하라고 일렀으나 응해주질 않았다. 이 순사가 다시 일본식 두루마기를 입은 신사를 데리고 오기에 본인은 다시 아까 그 자를 체포하라고 청구했으나 너가 관계할 바 아니라며 거기서 떠나 버리는 것이었다. 본인은 잇달아 남대문통(南大門通) 인도(人道)에 있는 두 집의 운송점까지 추적(追跡)하였으나 종내 군중 속에 섞여들어 예의 조선인을 떨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조선인이 10월 11일 검사정(檢事廷)에서 보여준 피고 강우규에 틀림이 없다는 취지의 공술기재(供述記載).

증인 유마영이(有馬英二)의 예심신문 중, 본인은 다방 입구 앞에서 약 두서너 걸음 귀빈실 목책(木柵)과 줄지어 있는 인력거 사이, 약 2m의 공지(空地)의 뒤쪽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는 약 40명 가까운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나의 오른쪽 앞에 있던 조선인이 직경(直徑) 6cm정도의 타원형의 검은 공을 총독이 있는 쪽으로 냅다 던지는 것이었다. 던지던 그 사나이를 퍼뜩 쳐다보니, 그 조선인은 던지자 곧 뒤로 물러서서 2·3초 뒤 폭음소리를 듣고는, 확 몰려드는 군중 속에 섞여 정거장 입구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유유히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그 사나이의 복장은 흰무명복에 두루막을 걸치고 나이 50세 정도였다. 보여준 강우규는 앞서 경찰서도 본 바와 같이 폭탄을 던진 사나이가 바로 그 임이 틀임없다는 취지의 공술기재(供述記載).

증인 장강경작(長岡敬作)의 예심신문 조서 중, 대정(大正) 8년 9월 2일 하오 5시 10분, 총독이 남대문역(南大門驛)에 도착하여 귀빈실에 들어가 귀빈실 앞 목책(木柵) 곁에 대기 중인 마차(馬車)에 올라, 오른쪽으로 꺾어 동쪽을 향해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을 때, 아홉번째 예포(禮砲)가 올리고 난 뒤 약 2분쯤 지나 폭음이 났으므로 뒤를 돌아보니 총독의 마차의 뒷바퀴에서 뒤쪽 약 일곱 걸음, 즉 총독의 마차와 정무총감(政務摠監)의 마차 사이 중간 쯤에서 연기가 조금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직각적(直覺的)으로 폭탄을 던진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길이 약간 패인 곳에 콩크리이트 덩어리가 있어서 폭탄은 그 덩어리에 부딪쳐 반격한 파편(破片)이 흩으진 것으로 보였으며, 주로 서쪽과 북쪽에 있던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노라는 취지의 골술기재.

증인 이등무언(伊藤武彦)의 예심신문 조서 중, 재등총독(齎藤總督)은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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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하오 5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귀빈실로 들어가 그 입구에 대기 중인 마차를 타기 위해 입구로 나오자 의복병(儀伏兵)이 경례를 하고 총독이 답례하면서 나팔 취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난 뒤 마차에 올라 오른쪽에 앉고, 본인은 그 앞쪽에 앉았으며 총독부인은 그 왼쪽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와 동시에 마차는 달리기 시작하여 마차가 마침 다방 부근에 이르렀을 때 돌연 마차 후방에서 큰 폭음이 들리고 연기가 치솟았다. 그러자 군중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총독은 나에게 다이나마이트를 던졌구나 하고 말했기 때문에 본인은 비로소 폭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사이에도 마차는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그냥 달려가 관저(官邸)에 도착했다. 도착 후 총독이 자기 허리께에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으므로 조사해본 즉 흰하복의 오른쪽 허리쯤 접어올린 부분에 구멍이 뚫어져 있고 혁대(革帶)가 약간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찢어진 혁대 속에 조그만 파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차 뒷부분에는 6개처의 탄흔(彈痕)이 있고, 그중 한개는 관통(貫通)하였고 하나는 총독과 부인과의 사이에 있던 의자에 탄편(彈片)이 끼어 있었다. 또 하나는 마차의 등뒤 기대는 부분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취지의 공술기재(供述記載).

감정인 포병대령(砲兵大領) 도전국언(島田國彦)의 폭탄감정서 중, 본건 압수의 증제1호, 제4호 내지 제8호의 철편(鐵片)을 토대로 감정컨대, 폭탄의 형태는 구형(球形)이 아니고 약간 가느다란 달걀 모양을 하고, 단경(短經) 약 5·60밀리, 장경(長經) 약 8·90밀리, 부피 5·6밀리, 외면(外面)에 깊이 약 2mm의 서너 가닥의 가로 홈이 패여 있고 11·2가닥의 세로 홈이 패어 있는 주철제(鑄鐵製) 탄체(彈體)의 외부에 부피 약 4·5mm내지 6mm의 돌기부(突起部)가 있으며, 후자(後者)에는 직경 2mm의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안전장치 또는 발화장치의 일부는 폭탄 외부에 있었다. 폭탄의 위력은 그 파열점(破裂點)에서 10m 내외의 거리에 있어서도 인축(人畜)을 살상할 수 있는 위력이 있다. 영국식 예화 수류탄(曳火手榴彈)은 그 형상이 대소(大小), 외면에 나 있는 홈의 간격, 그리고 깊이가 더불어 전기 형상과 일치하며, 외부에 있는 돌기(突起) 역시가 전기의 것과 근사하며, 구조 위력 역시 전기의 추정(推定)과 합입(合一)함을 알 수 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본정(本町)경찰서 경부(警部) 오촌진(奧村進)의 9월 1일 남대문역전에 있었던 폭탄사건의 부상자(負傷者) 명단에 관한 보고서 중, 판시와 같이 37명이 부상하였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의사(醫師) 뇌호결(瀨戶潔)의 귤향귤(橘香橘)에 대한 진단서 중, 복부(腹部) 좌계늑부(左季肋部) 아래 부정형(不定形)의 직경(直徑) 약 2분(分)의 관통창(貫通創)이 복강(腹腔)을 관통하고 있다. 개복술(開腹術)에 의해 정사(精査)한 바 복강내(腹腔內)에는 혈액(血液) 같은 삼출액(滲出液)이 가득 차 있는 강장(腔腸) 중앙에 직경 약 2분(分) 정도의 관통창(貫通創)이 있었다. 이것은 장관내(腸管內)를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쪽 장벽(腸壁)을 뚫고 나간 장관막(腸管膜)의 중앙, 손바닥만한 장막(漿膜) 아래 출혈(出血)이 있었다. 이 상처 좌우에 약 8푼(分) 정도의 사입구(射入口)를 볼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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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행결정(橫行結腸) 조금 왼쪽에 치우쳐 장벽관통창(腸壁貫通創)이 있었으며 이것은 장관(腸管) 안을 뚫고 나가 있었다.

그 밖에도 왼쪽 대퇴골(大腿骨) 하단(下端), 외부(外部) 좌전박(左前膊), 좌퇴골(左腿骨) 상부(上部), 왼쪽 제3, 제4지(指)에 철편(鐵片)에 의한 창상(創傷)이 있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증인 뇌호결(瀨戶潔)의 예심신문(豫審訊問) 조서 중, 귤향귤(橘香橘)은 대정(大正) 8년 9월 2일 하오 5시반경, 남대문 역전에서 폭탄으로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入院)했다가 11월 1일 상오 9시에 사망했다. 사망의 직접 원인은 폐렴(肺炎)이나 이 폐렴은 복막염(腹膜炎)에서 온 것이다. 결국 철편(鐵片)이 복부(腹部)에 사입(射入)하여 장(腸)에 결손(缺損)을 초래한 위에 그 내용물(內容物)이 흘러나와 복막염을 일으키게 되었고, 개복수술의 결과로 폐렴을 일으켜 사망하게 되었다는 취지의 공술기재(供述記載).

의사 전중환치평(田中丸治平)이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을 진단한 진단서 중,

우대퇴(右大腿) 관통 맹관창(盲管創) 외에 두 곳의 창상(創傷)이 있었다. 치료 중 급기야 외상성(外傷性) 패혈증(敗血症)에 의해 9월 11일 하오 2시 20분 사망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증인 전중환치평(田中丸治平) 예심신문 조서 중,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은 9월 2일 방금 폭탄에 맞았다면서 치료를 요구하여 입원 가료 중, 9월 11일 오후 2시 20분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 그 원인은 외상에 의하여 미균(黴菌)이 침입, 패혈증(敗血症)을 일으킨 데 기인한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증인 백준기(白駿基)의 예심신문 조서 중,

본인은 9월 2일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경호(警濩)하기 위해 남대문 정거장 귀빈실 입구, 왼쪽 목책(木柵) 밖에서 경비를 하던 중 폭발물에 의해 눈을 부상하여 그 후 1월 10일에 이르렀으나 아직 치유(治癒)되지 않는다는 공술기재.

증인 산구간남(山口諫男)의 예심신문 조서 중,

9월 2일 남대문역 귀빈실 앞에서 총독의 마차가 약 10m쯤 나아갔을 때, 내 왼쪽 약 14·5m지점에 무언가가 폭발하여 나는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그리하여 폭발물에 맞은 것으로 직각하고 곧 도기병원(島崎病院)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그날 밤 8시경 총독부의원(醫院)에 입원 치료중이라는 취지의 공술기재.

증인 도전박(稻田博)에 대한 예심신문 조서 중,

산구간남(山口諫男)은 9월 2일 하오 8시경 입원, 본인은 우쇄골(右鎖骨) 상와(上萵)에 너비 0.5cm, 길이 약 1cm의 상처를 입었다. 그 길이는 약 8cm 가량으로, 그 부상 국부에 이상한 것을 촉감하여 엑스 광선으로 진찰 결과 제4 늑골에 길이 1.5cm, 나비 0.5cm쯤 되는 열쇠 모양의 탄편(彈片)이 박혀 있음을 발견했다. 그 밖에, 뺨 왼쪽 부분에 맹관총창(盲管銃創)이 나 있고, 그 총창의 결과는 생명에는 무관하다는 공술기재.

증인 소모전십태랑(小牟田十太郞) 예심신문 조서에 남대문역 귀빈실 목책(木柵) 밖에서 총독의 마차가 끽 소리를 내며 출발하려는 순간, 폭음과 아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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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폭탄을 맞아 대퇴부(大腿部)에 두 군데, 그리고 그 밖에도 찰과상(擦過傷)을 두군데 있고, 오른쪽 귀 고막(鼓膜)에 파열창(破列創)을 받았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용산위수병원장(龍山衛戍病院長)의 촌전신내(村田信乃)에 대한 병상일기(病床日記) 중,

9월 2일 남대문역 귀빈실 출구 앞에 있던 군중에게 폭탄이 작열하여 복부(腹部) 정중선(正中線)의 오른쪽 제7 늑골 사이에 길이 8cm, 너비 2cm의 다개창(哆開創)을 받았다는 취지의 기재.

촌전신내(村田伸乃)의 전말서 중,

대정(大正) 8년 9월 2일 총독이 남대문역을 출발할 때 군중 속에 던진 폭탄의 파편(破片)이 복부(腹部)에 명중하여 맹관창(盲管創)을 받고, 그때부터 줄곧 입원가료 2주일이 경과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안등우삼랑(安藤右三郞)의 시말서중, 9월 2일 총독 탑승(搭乘)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 자(者)가 있었다. 폭발로 인해 오른쪽 팔 상박부(上膊部)에 부상을 당하고 4·5일의 치료를 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김태석(金泰錫)의 시말서 중,

9월 2일 총독 착임(着任)으로 정거장 앞으로 사찰(査察) 근무 중, 폭탄의 파편을 맞아 오른쪽 다리 경상부(脛上部)에 깊이 5푼(分), 너비 한치 정도의 복숭아 꼴의 부상을 받고 출혈(出血)을 했으나 1주일 후에 치유(治癒)되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의사(醫師) J.W. 하르스트의 W.B. 해르슨 부인(夫人)에 대한 진단서 중, 9월 2일 정거장 앞에서 투하된 폭탄의 파편(破片)으로 오른쪽 어깨 뒤, 왼쪽 뺨, 왼쪽 엉덩이, 오른쪽 겨드랑과 오른쪽 팔굽 중간에 부상을 당해 수일간 치료 끝에 전치되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증인 양창화(楊昌華)의 예심신문 조서 중, 9월 2일 남대문역전에서 폭탄을 맞아 다리에 부상을 입고, 접골(接骨) 치료를 받아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대정 9년 1월 19일에 이르러도 아직 자유로히 걸을 수 없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증인 암미무(岩尾茂)의 예심신문 중, 9월 2일 오후 5시경 귀빈실 목책(木柵) 오른쪽에서 폭탄을 맞아 오른쪽 발목에 맹관창(盲管創)을 받았다는 공술기재.

증인 구도행태랑(久渡幸太郞) 예심조서 중, 9월 2일 귀빈실 입구 목책 바깥에서 폭탄을 맞아 오른쪽 손목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공술기재(供述記載).

박완식(朴完植)의 시말서 중, 9월 2일 총독부 승용마차에서 약 3·4m 떨어진 곳에서 폭탄의 파편을 맞아 왼쪽 다리 무릎 부분에 두 곳의 창상(創傷)을 받았으나 3주일의 치료 끝에 전치(全治)되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권오용(權五鎔)의 시말서 중, 9월 2일 귀빈실 앞 광장(廣場)을 경비 중, 자기 있는 데서 약 5·6보(步) 떨어진 곳에 폭탄이 파열하여 그 파편을 맞아 오른쪽 대퇴 상부 및 왼쪽 대퇴(大腿) 상부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박정화(朴貞和)의 시말서 중, 9월 2일 귀빈실 앞 광장에서 폭탄과 편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약 42일간 치료한 끝에 치유됐다는 취지의 기재.

지광연(池光淵)의 시말서 중, 9월 2일 하오 5시경 귀빈실 앞 약 6·7m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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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측면에서 폭탄 파편을 맞아 왼쪽 뺨, 왼쪽 손목, 경부(脛部)에 창상(創傷)을 받아 약 1개월간 치료를 했다는 취지의 기재.

황춘엽(黃春燁)의 시말서 중, 2일 귀빈실 입구 서쪽에서 폭탄 파편을 맞아 왼쪽 허벅지 윗부분과 오른쪽 허벅지 윗부분에 부상을 당해 1개월 이상 치료를 한 끝에 치유되었다는 취지의 기재.

이장용(李長龍)의 시말서 중, 2일 남대문역 다방(茶房) 입구 서쪽에서 폭탄의 파편으로 왼쪽 허벅지 윗부분에 부상하여 1개월 이상 치료 끝에 치유되었다는 취지의 기재.

박성팔(朴聖八)의 시말서 중, 귀빈실에서 17·8m 떨어진 곳에서 경비를 하던 중, 큰 폭음소리가 난 뒤 보행(步行)하려 하자 양복 바지에 선혈(鮮血)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는 취지의 기재.

성대용(成大鏞)의 시말서 중, 9월 2일 하오 5시경 역전에서 폭탄이 폭발하여 좌경(左脛)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기재.

근등구길(近藤龜吉)의 시말서 중, 9월 2일 하오 5시 20분경, 폭탄이 파열하여 그 파편을 맞아 오른쪽 다리 관절부(關節部)에 부상을 당해 11월 13일 전치(全治)했다는 취지의 기재.

박재인(朴在仁)의 시말서 중, 9월 2일, 남대문역 다방 서편에서 폭탄의 파편을 맞아 오른쪽 다리에 상처를 입고 24일만에 치유되었다는 취지의 기재.

박홍식(朴弘植)의 시말서 중, 2일 하오 5시경 귀빈실 앞 서쪽에서 폭탄의 파편을 맞아 어깨, 겨드랑 밑, 왼쪽 다리에 부상을 당해 약 2개월 후 치유되었다는 취지의 기재.

엄관서(嚴寬瑞)의 시말서 중, 2일 남대문역 다방 앞에서 폭탄 파편을 맞아 왼쪽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는 취지의 기재.

무정연태랑(武井延太郞)의 시말서 중, 2일 역전에서 총독의 마차 뒤 약 3자쯤 되는 지점에 폭탄이 떨어져 그 파편을 맞아 부상을 당한 후 약 달포 후에 치유되었다는 취지의 기재.

이관중준(伊關重俊)의 시말서 중, 2일 하오 5시 5분경, 귀빈실 앞에서 한방의 폭음과 함께 오른쪽 다리에서 출혈하였기 입원 치료를 가하면서 철편(鐵片) 한 개를 뽑아내고 3주일간 치료 끝에 퇴원했다는 취지의 기재.

삼하삼남(森下三男)의 시말서 중, 2일 하오 5시 넘어 남대문역전에서 폭탄을 투하한 자(者)가 있었다. 불행히도 그 파편이 8군데나 맞아 오른쪽 발에 하퇴관통창(下腿貫通創) 및 된발에도 창상(創傷)을 받아 10월 15일경 간신히 쾌복(快復)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산내호남(山內虎男)의 시말서 중, 2일 남대문역에서 폭탄의 파편을 맞아 오른쪽 발 상갑부(上甲部)에 부상을 당해 10월말경 치유되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서전국길(西田國吉)의 시말서 중, 9월 2일 하오 5시경, 폭탄으로 오른쪽 대퇴부(大腿部) 맹관장(盲管腸) 및 그 밖에 3개처나 부상을 입고, 11월 14일 치유되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조선총독부의원(醫阮) 의관(醫官)의 아부정일(阿部政一)에 대한 진단서 중, 양쪽 대튀부(大腿部)에 맹관 폭탄창(盲管爆彈創)을 받아 향후(向後) 3주일간 입원치료를 요한다는 취지의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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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정구담(井口談)의 야진요태랑(野津要太郞)에 대한 진단서 중, 왼쪽 전박(前膊), 왼쪽 손등(手背), 왼쪽 하퇴(下腿) 상단에 폭탄 파편을 맞아 창상(創傷)이 생겼다는 취지의 기재.

동상(同上) 구보요장(久保要藏)에 대한 진단서 중, 왼쪽 대퇴(大腿) 중앙의 뒷면에 자창(刺創)이 있다. 원인은 대정(大正) 8년 9월 2일, 폭탄의 파편(破片)을 맞아 생긴 것이라는 취지의 기재(記載).

의사 안상호(安商浩)의 이원승(李源昇)에 대한 진단서 중, 좌관절(左關節)에 하부 타박열창(打撲裂創)이 골막(骨膜)에 달하여 치료일수(治療日數) 10일간을 요한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하원청태랑(河原淸太郞)의 시말서 중, 9월 2일 남대문역두에서 폭탄의 파편을 받아 왼쪽 두부(頭部) 및 왼쪽 손등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기재.

등을 종합하고, 또 압수한 증제(證第) 1호, 증제4호 내지 증제8호, 증제27호의 각 탄편(名彈片), 증제9호의 타월, 증제12호의 명주천(明紬纎) 조각, 증제13호 파나마모(帽), 증제28호, 29호의 승선(乘船) 배표, 증제30호의 전보원서(電報原書)에서 비쳐보건대 이 사실을 증빙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것을 법률(法律)에서 미루어 보건대 피고 강우규의 소위(所爲)는 폭발등 취체벌칙 제1조 전단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사형 또는 무기(無期), 혹은 7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禁錮)에 처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법규경합(法規競合)의 경우, 특별법규를 배제할 수 있다는 법규 해석상의 원칙에서 한 소위(所爲)를 특별법규상의 범죄와 보통법규상의 범죄에 동시에 성립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전기 벌칙이 보통 형법에 대한 특별법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동벌칙 제12조는 특별법규인 동칙(同則)에 규정한 범죄에 대한 형(刑)이 보통 법규인 형법(刑法)에 규정한 범죄에 대한 형보다도 경미(輕微)할 경우를 우려하여, 이런 경우 형법에 따라 형법의 형(形)이 무거울 때는 무거운 형법을 택하여 처단한다는 예외규정(例外規定)에 의거한다.

만일 형법의 형이 전기 벌칙의 형보다 가벼울 때는 전시 원칙에 따라 특별법규인 전기 법칙 제1조에 의해서만 처단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반대의 판례(判例)가 있다고는 하나 당원(當院)은 이것을 채택하지 않는다. 따라서 형법규정의 범죄가 무거우냐 무겁지 않느냐에 대해 형법의 각조(各條)에 따라 고려하건대, 피고의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에 대한 살인미수의 소위(所爲)는 형법 제199조, 제203조에 해당하므로 사형 또는 무기, 혹은 3년 이상의 징역에,

귤향귤(橘香橘),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에 대한 상해치사(傷害致死)의 소위는 각각 형법 제205조 제1항에 해당하므로 2년 이상의 유기징역(有期懲役)에,

기타의 판시(判示) 35명에 대한 상해(傷害)의 소위는 형법 제204조에 해당하므로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원 이하의 벌금 내지 과료(科料)에 처해야 할 범죄이다.

그리고 1개 행위가 수개의 죄명(罪名)에 저촉하는 견련범(牽連犯)이므로 동법 제54조 제1항 전단 제10조에 따라 그 가장 무거운 살인미수죄의 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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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야 하며, 나아가 형법 제10조에 의해 이것을 전기벌칙의 형과 대조할진대, 그 범정(犯情)이 무거운 동 벌칙형을 무거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동 벌칙 제12조에 따르지 않고, 전기 원칙에 따라 동 벌칙 제1조만을 적용하여 그 소정형(所定刑)의 범위에서 사형(死刑)을 선택하여 과형(科刑)해야 하며,

다음 피고 최자남(崔子男)의 소위(所爲)는 동 벌칙 제5조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禁錮)에 처해야 함으로 징역형(懲役刑)을 선택하며,

피고 허형(許炯)의 소위는 동 벌칙 제8조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해야 함으로 이것 역시 징역형을 선택하여 각기(各其) 형기범위 내(刑期範圍內)에서 각각 주문(主文)의 형을 과해야 한다.

압수물건 중 증 제1호, 증 제4호 내지는 증 제8호, 증 제27호의 각 탄피는 범죄행위를 조성한 물건으로서 범인(犯人) 외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것이므로 형법 제19조 제1항 제1호 및 동조 제2항에 의해 몰수하고, 그 나머지는 몰수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형사소송법 제202조에 의해 각 소유자에 환부(還付)한다.

공부재판비용(公祔裁判費用) 금 50원은 동법 제201조에 의해 이것을 5분하여 피고 강우규에게 그 3을, 피고 최자남, 피고 허형에게 각각 그 1을 부담키로 한다.

피고 오태영(吳泰泳)이, 피고 강우규의 전기 범행 후 그 자를 동숙(同宿)시키고, 그 자의 연령, 인상(人相)이 신문지상에 보도된 폭탄투척범인의 인상과 흡사하고, 그 자의 태도, 말, 기타 사정들이 피고인 강우규의 그것과 틀림없어, 폭탄투척범인이 강우규임을 인지하고서도 이것을 경찰관리에게 고지(告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피고 강우규의 간청에 따라 그 자가 관헌(官憲)에게 체포를 면하게 하기 위해, 대정 8년 9월 7일, 그 자를 경성부 가회동(嘉會洞) 82번지 장익규(張翊奎) 집에 투숙시켜 은피(隱避)케 하였다는 취지의 공부사실(公祔事實)은 이것을 인정할 만한 증빙(證憑)이 충분치 않다.

따라서 형사소송법 제236조, 제224조에 의해 무죄를 선고(宣告)해야 한다.

따라서 주문(主文)과 같이 판결한다.

조선총독부 검사 경장삼랑(鏡長三郞)이 본건에 관여한다.


판결 대정(大正) 9년 형공(刑控) 제105, 1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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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原面) 영덕리(靈德里) 68 재적

중국 길림성(吉林省) 요하현(饒河縣) 신흥동(新興洞) 거주

농업 통칭 찬구(燦九)

강우규(姜宇奎) 66세

원산부(元山府 상동(上洞) 83 재적

동부 광석동(廣石洞) 1번지 거주

잡화상 최자남(崔子男) 43세

우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피고사건에 대해 대정 9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선고한 유죄 판결에 대해 피고 수명(數名)으로부터 각 공소(控訴) 신립이 있기에 조선총독부 검사 길전항태랑(吉田恒太郞) 간여하에 좌와 같이 심리판결한다.

주문

원판결 중 피고 강우규에 대한 부분은 이를 취소한다.

피고 강우규를 사형에 처한다.

피고 최자남의 공소(控訴)를 기각(棄却)한다.

압수품 중 증제1호, 증제4호 내지 8호의 탄편(彈片)은 몰수하고 그 나머지는 각 소유자에게 환부한다.

공소(公訴) 소송비용금 50원은 4분하여 그 3을 강우규가, 그 1을 피고 최자남의 부담으로 한다.

이유

피고 강우규는 장로파(長老派)예수교 신도로서 명치(明治) 43년 한일 양국(兩國)이 병합하자 크게 이에 분개한 나머지 조선 내에 살기를 치사하게 생각한 나머지, 이듬해 명치 44년 봄 재적지인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原面)을 떠나 중국 북간도(北間島) 두도포(頭道浦)에 이거(移居), 이어서 동 길림성(吉林省) 동부 시베리아 연해주(沿海州), 흑룡강 각지를 방랑하다가 대정 6년 현주소인 중국 길림성 요하현(饒河縣) 신흥동(新興洞) 조선인 부락에 정착(定着), 이곳에서 사립(私立)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코 조선인 자제(子弟)의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동안 은근히 국권(國權)을 회복하고 조선의 독립을 요망하여 청년 자제(子弟)에게 그 사상을 고취 선전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노인회(老人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던중, 대정 8년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일파의 조선독립 선언(宣言)에 의해 조선 각지에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소요(騷擾)가 빈발하기에 이르렀다.

피고 강우규는 그해 4월 거주지 신흥동(新興洞)에서 스스로 주창자가 되어 조선에 있어서의 그 후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그해 5월말경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의 선인촌(鮮人村)으로 가 조선총독 장곡천(長谷川)이 불원 그 직(職)을 떠나 귀국하나 새로 누구가 후임 조선총독으로 내임(來任)하는가를 알아냈다. 피고 강우규는, 이 사실을 천만 뜻으로 생각했으며, 장곡천(長谷川) 총독이 다년간 조선에 재임(在任)하여 조선 사정에 정통하여 선일동화정책(鮮日同化政策)을 시행하여 통치의 소임(所任)을 다했으나, 최근에 이르러 조선인이 치열한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도저히 조선통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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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조선독립은 어차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단연 그 직을 물러나 조선에서 떠나려 하는데 반(反)하여, 새 총독은 그가 어떤 인물이든, 무슨 승산(乘算)이 있어서 내임(來任)하려는가? 그 내임이야말로 세계의 대세(大勢)인 민족자결주의를 배반하고, 천의(天意)를 거역하며 인도(人道)를 무시하여 동아평화를 교란함으로써 조선인 2천만 동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이다. 이에 분개한 나머지 일명(一命)을 내던져 신임 총독을 살해하고 조선인의 열의를 표명하고 내외(內外)의 동정을 얻어 조선독립의 승인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단 그의 거주지 신흥동(新興洞)으로 되돌아가 앞서 동부서촌(東部西村) 및 우스리의 철도선(鐵道線) 청룡역(靑龍驛) 부근에서 한 러시아인으로부터 사용법을 들은 바 있어 미리 구입해 두었던 주철제(鑄鐵製) 영국식 예화수류탄(曳火手榴彈) 1개를 가지고 이것으로 신임 조선총독을 살해할 것을 기도했다. 그리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이 폭탄을 헝겊 속에 싸서 이것을 꿰맨 뒤, 그 한끝을 허리에 맺아 두루마기 밑 옷 속에 차고는 그해 6월 11일 그곳을 떠나는 기선 월후환(越後丸)을 타고 그달 14일 아침 조선 원산(元山)에 상륙하였다. 그리하여 동부(同府) 본정(本町) 5정목 42번지 원일(元一)여관에 투숙, 다음날 15일 동부 광석동(廣石洞)에서 옛날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에서 서로 알게 된 피고 최자남(崔子男)을 만나 하오 동부 상동(上洞) 183번지인 최자남의 주택에 기숙하면서 휴대해 온 폭탄을 그 집 천장 위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는 매일 신문지상을 통해 신임 총독이 누구이며 언제 내임(來任)하는가를 탐지하고 있었다.

그해 7월 17일 최자남이 전 광석동(廣石洞) 1번지인 신축가옥에 이전해 가자, 함께 그 새집으로 옮겨 가, 그날 밤 최자남과 더불어 그 집 사랑(舍廊)에 취침하다가 밤중에 최자남에게 자기는 조선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귀선(歸鮮)했으며 그 운동에 필요하여 폭탄 1개를 가져왔노라고 말해 주고는 그 사용방법을 소상히 설명한 뒤 이것을 감추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피고 강우규는 그해 8월 4일 원산부 체재중 서로 알게 된 원심(原審) 피고 허형(許炯)과 함께 기차를 타고 원산(元山)을 출발하여 도중 석왕사(釋王寺) 영월(暎月)여관에서 1박한 뒤, 다음날 5일 그곳을 떠나 서울에 당도하여 허형(許炯)의 소개로 동부 안국동(安國洞) 96번지 김종호(金鍾護) 집에 투숙하면서 나날이 형세를 엿보고 있었다.

조선총독 장곡천(長谷川)은 이미 그해 7월 5일 경성을 출발하여 동상(東上)하고 8월 초에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후임 조선총독을 해군대장 남작(男爵) 재등실(齋藤實)이라는 보도가 신문지상을 통해 전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 신임 총독의 내임(來任)에 대비하여 예정된 계획을 실행하고자 그달 17·8일경 원산부(元山府)로 가서 앞서 맡겨 둔 폭탄 1개를 최자남의 집에서 받아내어 경성으로 돌아와 김종호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날 12일부로 조선총독의 임명(任命)이 발표되고 가까이 부임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신문지상에 심임 총독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음을 보고 총독살해에 계획·실천을 반드시 이룰 것을 한결 더 굳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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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달 20일경 원산부로 가서 최자남의 소개로 어느 누구가 폭탄 2개를 감추어 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부 신촌동(新村洞) 21번지 거주 한흥근(韓興根)을 만나 폭탄 1개를 교부해 줄 것을 부탁한 뒤 경성으로 돌아왔다.

신임총독의 경성 착임(着任)의 일자가 9월 2일이라는 보도를 신문지상에서 보고, 안국동 숙소에서 남대문역까지 너무 거리가 먼 관계로 일을 치르기에는 불편하다고 생각하여, 8월 26일 전기 역(驛) 부근 남대문통(南大門通) 5정목 60번지 여인숙(旅人宿) 박영선(朴泳鐥)의 집에 전숙(轉宿)키로 했다. 그리하여 매일 남대문역(驛) 부근을 배회하면서 역 입구의 지형(地形)을 연구하고 있은 바 그달 31일 허형(許炯)으로부터 최자남 발(發) 피고 강우규의 변명(變名)인 강영일(姜寰一) 앞으로, 아들이 왔으니 즉시 돌아오라는 암호 전보가 왔다는 전갈을 듣고, 허형에게 부탁하여 최자남을 중간에 세워 한흥근으로부터 폭탄을 받아내려 했으나 한흥근은 그 전날 블라디보스톡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허형은 다음날 9월 1일 허행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9월 2일 상오 피고 강우규는 미리 바지 앞 부분에 명주 수건의 끝을 기워 매워 그가 소유하고 있던 수류탄 1개를 그 수건 안에 넣어 그 끝을 접쳐 허리 뒤로 돌려 굳게 조아맸다. 그 위에 저고리와 모시 두루라기를 입고, 손을 드리밀면 곧 폭탄을 드러낼 수가 있도록 장치를 했다. 그런 후에 검정테 파나마모(帽)를 쓰고 가죽신을 신고 손에는 양산과 타월을 쥔 채 숙소를 출발하여 남대문역(驛)으로 갔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하오 4시경부터 환영을 위해 많은 거마(車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총독의 착임(着任)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탈 승용마차(乘用馬車)를 찾다가 마침 귀빈실 입구에 대기시켜 놓은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폭탄을 투척할 장소 위치를 선택하여 귀빈실 동북쪽 울타리 부근에 있는 다방 출입구 앞 군중 속에 섞여 들어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 하오 5시경 동역(同驛)에 도착한 열차에서 신임 총독 일행(一行)이 하차하여 전기 귀빈실을 통과하여 그 앞쪽 출입구에서 나와 총독 재등실은 그 부인(夫人)과 비서관 이등무언(伊藤武彦)과 상호 전후하여 마차에 오르므로 피고 강우규는 미리 신문에 본 바 있는 사진과 틀림없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미리 폭탄을 꺼내 바른 손에 잡고, 왼손으로 타월을 덮어 이것을 엄폐한 뒤 내던질 준비를 완전히 갖추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안전전(安全栓)을 뽑고 폭탄을 던지면 터지는 동시에 마차 주위에 모인 군중들이 부상을 당하게 될 것을 예기하면서, 약 12·3m 거리에서 마차에 타고 있는 조선총독 재등실의 가슴을 겨냥하여 폭탄을 내던졌다. 그런데 폭탄은 마차 앞 약 7보(步) 가량 되는 지점에 떨어져 무서운 굉음과 함께 파열하여 파편(破片)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중 몇 개가 조선총독 승용마차에 맞아 그 중 한 개가 마차의 뒤쪽을 뚫고 조선총독 재등실의 허리에 차고 있는 대검(帶劍)을 손상한 데 그쳤을 뿐 신체는 아무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변두리에 흩어진 파편으로 대판 조일신문사 경성 특파원 귤향귤(橘香橘)의 복부에 탄편 하나가 관통하여 복관(腹管)을 손상시켜 복막염 및 폐렴을 일으켜 그해 11월 1일 상오 9시, 경성부 욱정(旭町) 2정목 뇌호병원(瀨戶病院)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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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순사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은 탄편(彈片)이 왼쪽 대퇴부(大腿部)에 뚫고 들어가 외상성(外傷性) 패혈증(敗血症)을 일으켜 그해 9월 11일 하오 2시 20분 동부 서□정(西□町) 전중환병원(田中丸病院)에서 사망했다.

대판매일신문사(大阪每日新聞社) 경성특파원 산구연남(山口鍊男)은 오른쪽 무릎에 폭탄창(爆彈創)을,

육군소장 촌전신내(村田信乃)는 복부 정중선(正中線)의 오른편 배꼽 위, 제7·8 늑연골(肋軟骨)이 서로 맞닿는 곳에서 한뼘쯤 가로에 길이 0.8cm, 너비 0.2cm의 치개창(哆開創)을 입었고,

그 밖에 본정(本町)경찰서장 소모전십태랑(小牟田十太郞), 동서(同署) 경부 권오용(權五鎔), 동 순사 박정환(朴貞和), 종로경찰서 순사 아무정일(阿武政一), 동 박완식(朴完植), 조선신문사 기자 하원청태량(河原淸太郞), 동사 사진부원 구등행태랑(久藤幸太郞),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장 구보요장(久保要藏), 동 운수과장 안등우삼랑(安藤右三郞), 동국 촉탁 야진요태랑(野津要太郞), 경성일보사 사진반 무정연태랑(武井延太郞), 미국인 W.P. 해리슨 부인(夫人), 순사 박성팔(朴聖八), 동 지광현(池光鉉), 동 김복지(金馥▼(氏+土)), 도경부 김태석(金泰錫), 이왕직 사무관 이원승(李源昇), 조선총독부속(朝鮮總督府屬) 이관중준(伊關重俊), 동부 고원(雇員) 서전국길(西田國吉), 동 삼하삼남(森下三男), 동 산내호남(山內虎男), 경성감옥 수업수(授業手) 야방을삼랑(野方乙三郞), 차부(車夫) 성대용(成大鏞), 동 근등귀길(近藤龜吉), 동 암미무(岩尾茂), 동 박홍식(朴弘植), 동 엄관서(嚴寬瑞), 동 박재인(朴在仁), 동 황춘엽(黃春燁), 동 이장룡(李長龍), 개성군(開城郡) 남면(南面) 후석리(候石理) 양창화(楊昌華) 등은 가기 중경상을 입었으나 사망하지는 않았다.

피고 최자남은 장로파 그리스도신도로서 10수년 전 노령(露領) 시베리아에 출가(出家), 대정(大正) 7년 음력 1월경 귀선(歸鮮)하여 그때부터 원산부(元山府) 상동(上洞) 183번지에 거주하면서 잡화상(雜貨商)을 경영해 왔다. 대정 8년 6월 15일경, 동부 광석동(廣石洞) 노상에서 시베리아에서 서로 알게 되었던 피고 강우규를 만나 그때부터 강우규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였고, 그해 7월 17일경 동부 광석동(廣石洞) 1번지 신축 건물로 이전한 그날 밤, 강우규와 동가옥 사랑(舍廊)에서 취침하면서 야밤 중, 강우규가 하는 말이, 자기는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귀선(歸鮮)했으며, 그 운동에 필요하기 때문에 폭탄 1개를 휴대하였고, 그 폭탄의 위력은 6연발 권총 24정(挺)분에 해당하며, 사람이 밀집한 장소에 투척하면 근 100명의 인명을 살육할 충분한 위력이 있다는 취지와 폭탄 사용법을 듣고, 또 폭탄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피고 최자남은 강우규가 이 폭탄을 독립운동에 사용하여 인명(人命)을 살해할 것이라는 정(情)을 알면서 강을 위해 폭탄을 감춰줄 것을 승낙하고 이것을 건네받고는 자기 집 마루 천장 뒤에 숨겨, 그해 1월 17·8일경까지 이것을 보관 은익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피고 강우규가 당공정(當公廷)에서 진술한―

동 피고가 그 정(情)을 밝히고 피고 최자남에게 폭탄을 은익해 달라고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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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한 점, 한흥근(韓興根)에게 폭탄 1개를 교부해 줄 것을 의뢰한 점, 원심 피고 허형(許炯)을 시켜 폭탄 1개를 받아오라고 원산(元山)으로 보낸 점 및 조선총독 재등실과 그 밖의 여러 사람에게 대한 살해의 예견(豫見) 및 그 살상의 결과적 사실을 제외한, 이에 부합되는 자백(自白).

예심판사에 대한 최자남의 제1회 신문조선 중―나는 장로파 그리스도교도로서 18년 전 노령(露領) 시베리아 니코라프시코로 가서 9년간 거주하다가 일단 귀국, 3년 후 다시 그곳으로 가 야채 영업 및 기타 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 후 귀선(歸鮮)하여 현주소에 거주하고 있으나, 전기 노령 니코라프시코에 거주하는 동안 피고 강찬구(姜燦九)가 출가(出家)를 위해 나의 집에 찾아와 체재한 적이 있어 서로 알게 된 사이다. 그리하여 대정 8년 음력 5월 본인이 구차가(舊借家)인 원산부(元山府) 상동(上洞)의 가옥에 살고 있을 때, 찾아와 그때부터 내 집에서 묵게 되었고, 이 집에서 약 1개월 숙박 후 현주소인 내 신축 가옥으로 옮겨 약 1개월을 체재한 바 있다.

그해 음력 6월 하순경인가 7월 상순쯤 신축가옥에 이전한 그날 밤, 피고 강우규와 나는 한 방에서 취침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나에게 자기는 조선독립을 위해 내선(內鮮)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가지고 있던 폭탄을 내보이며 이것을 사용하기 위해 사왔으니 부디 좀 맡아달라고 간청하기에 이것을 받아 내 집 부엌 위 천장 위에 숨겨 두었다.

본인은 당시 피고인 강이 이 폭탄을 가지고 누구를 살해할 것인지는 모르고 있었으나 사람을 살해할 것이란 점은 알고 있었다. 이 폭탄은 검은 철(鐵)로 만들어져 있고 외부 가로·세로로 몇 개의 줄무늬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폭탄의 꼬리 부분에 전(栓)이 붙어 있었다. 강우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전중(栓中)의 철사는 평소 뽑아 두나 사용할 때 다시 꽂아 전(栓)을 한 바퀴 돌린 뒤 고정시켜 놓고, 다시 가로로 잇닿은 선(線)이 있는데 이것을 뽑으면 발화(發火)하는 장치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폭탄의 위력은 6년발 권총 24정(挺) 정도의 힘이 있기 때문에 밀집한 군중에 투척하면 100명쯤 문제없이 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피고 강우규는 대정 8월 상순경, 이 폭탄을 나에게서 받아가지고 경성(京城)으로 갔다가 그달 22·3일경 다시 원산(元山)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내 소개를 받아 중리(中里) 신촌동(新村洞) 한흥근(韓興根)이란 자와 무언가 밀담(密談)을 하고 그 익일 경성으로 떠났으나, 그때 한흥근의 말이, 어떤 자가 폭탄 2개를 가지고 있으나 그 자가 부재중이므로 후에 전보를 칠 터이니 가지러 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달 26일 한흥근이 강우규에게 전보를 쳐 달라기에 본인은 경성 안국동(安國洞) 강우규의 숙소로 ‘아들이 왔으니 속히 와 달라’는 전보를 쳤으나 회답이 없었다.

그달 30일 하오 한흥근은 기선(汽船)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되돌아 갔으나 그날 밤, 강우규의 심부름꾼이라면서 허형이 경성에서 찾아왔다. 그러나 한흥근이 이미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허형은 허행한 채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본인에게 새로 내임하는 총독을 살해하기 위해 폭탄을 사용한다는 것이었으며, 강우규의 부탁을 받고 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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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에게 폭탄을 받아내기 위해 내원(來元)했노라고 말하였다는 취지의 공술기재(供述記載).

동상(同上) 피고 허형(許炯)의 제1회 신문조서 중, 본인은 대정 8년 8월께 원산(元山)에서 강우규와 알게 되었고, 몰래 기차편으로 경성으로 왔을 때 강우규와 갈마역(葛麻驛)에서 승차(乘車), 본인들과 함께 석왕사역(釋王寺驛)에서 하차(下車), 그곳 영월여관(映月旅館)에 숙박한위 경성으로 가, 안국동(安國洞) 96번지 김종호(金鍾護) 집에서 투숙했노라는 공술기재.

동상(同上) 피고 허형(許炯)의 제2회 신문조사 중, 전기 김종호 집에서 3,4일 숙박한 후, 강우규는 원산(元山)으로 간다고 말하면서 집을 떠나더니 약 10일 후에 돌아왔다. 그 뒤 본인에게 자기(강우규)는 남대문 밖에 전숙(轉宿)하고 있으니 만일 원산에서 자기 앞으로 전보가 오거든 알려달라는 것으로 그의 숙소를 알아두기 위해 동행한 적이 있다. 그 도중 강우규는 나에게 자기는 폭탄을 가지러 원산(元山)으로 갔으나 최자남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돌아오는 길이다. 만일 원산에서 전보가 오면 김종호 집으로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본이은 그 익일 8월 26,7일경, 김종호의 집으로 가 보았더니, 자기 집에 아이가 와 있으니 곧 와달라는 전보가 그 전날 와 있었다. 그래서 이것을 김종호가 보여주므로 보기는 했으나 강우규가 스스로 원산(元山)으로 간다 하기에 그냥 두었더니, 8월 31일 강우규는 다시 본인의 집으로 찾아 왔기에 전기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나를 원산에 가서 폭탄을 받아오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이를 승낙하고 그날 기차로 원산으로 가서 최자남을 만나 이런 취지를 이야기하자, 최는 폭탄을 소지하고 있는 자가 벌써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났기 때문에 폭탄은 줄 수 없다고 하므로 본인은 원산서 1박한 후 다시 경성(京城)으로 돌아와 그런 사연을 전달했다.

그해 9월 6일 강우규는 본인의 집에 찾아와, 그날 2일 남대문역의 폭탄 투척은 자기(강우규)가 총독에게 던진 것으로서, 그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치 못했노라는 취지의 공술기재(供述記載).

검사의 피고인 최자남의 신문조서 중―본인은 10년 전부터 장로파예수교도로서 일찍 원산부(元山府) 상리(上里) 상동(上洞) 183번지 차가(借家)에서 살고 있으며, 이해 7월 상순(上旬) 또는 하순께 동부(同府) 광석동(廣石洞) 1번지 신축 가옥으로 이전했다.

본인은 한일합병 이전부터 노령(露領) ‘니코리스코’에서 상업을 경영하고 있다가 약 3년 전에 원산으로 돌아왔다. 피고 강우규와는 전기 니코리스코에서 알게 된 사이이며, 그 뒤로는 만나지 못했으나, 대정 8년 7월경 강이 블라디보스톡 방면에서 승선(乘船)하여 원산(元山)에 상륙, 석우리(石隅里) 모 여관에 숙박하고 있던 중 나의 신축 가옥 앞에서 우연히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날부터 본인의 집에 체재하여 약 60일간 묵게 되었다.

본인이 신축 가옥에 옮겨간 그날 밤 강은 본인에게 자기(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직한, 50세 이상의 연로자로써 이뤄진 노인당(老人黨)에 가입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일하게 되었으며 그 대표로서 내선(來鮮)하였으나, 그 운동을 위해 기회를 보고 사용할 것이라 하면서, 주먹보다 약간 작은 철제(鐵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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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으로서 표면에 나이프로 깎은 듯한 줄무늬가 져 있는 것을 보여주면서 가지고 있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본인이 그 사용법 및 위력 등을 물은바, 주둥이에 붙어 있는 테를 잡아당기면 박혀 있는 철사가 빠져나오고 이것을 뽑은 뒤 던지면 폭발하게 되어 있다. 밀집한 군중에다 대고 던지면 한꺼번에 100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력이 있다. 본인은 강의 간청을 받아 맡아두게 되어, 부엌 쪽에 벽장을 만들어 사다리를 설치하여 사람 눈에 띠지 않게시리 높이 간수해 두었던 것이다. 강우규는 이 폭탄을 블라디보스톡에서 매입(買入)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 아마 강이 외국 사람으로부터 사들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강우규는 이 폭탄으로 사람을 살해할 수 있다고 말하므로 사용한 후의 여러 가지 광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8월 19일경 강우규는 고향으로 내려간다면서 경성(京城)으로 가 그달 24일 다시 내집으로 찾아왔었다는 취지의 공술기재(供述記載).

예심판사(豫審判事)의 증인(證人) 대야차랑(大野次郞) 제1회 신문 조서 중, 본인이 남만(南滿) 철도의 열차승구(列車乘區)의 급사(給仕)로서 대정 8년 9월 2일, 재등 신총독 착임(着任)에 있어, 그 광경을 구경하러 남대문역 다방 앞으로 가, 그 앞문 오른쪽 홈통 있는 곳, 석대(石臺) 위에 발을 걸치고, 그 앞쪽에 세워 둔 인력거의 포장과 홈통을 잡고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의 얼굴을 다 볼 수가 있었다. 내 옆에는 동역(同驛) 출찰계(出札係) 여사무원 4,5인이 구경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많은 인력거들이 엇비슷히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쪽, 즉 다방 입구 앞, 내 있는 곳에서 5·6m 떨어진 지점에 14,5인의 구경꾼이 모여 있는 가운데 조선인도 섞여 있었다.

총독이 마차에 탄 뒤, 약 2·3m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그 바른편 14,5명의 구경꾼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머리 위 약 1m쯤 높이에서 총독의 마차 쪽으로 고무공 크기의 까만 물건이 날아가면서 담배연기 같은 가느다란 연기가 솟아오르는 듯 느껴졌다. 동시에 그 까만 물체가 총독의 마차 뒤에 떨어지는 듯하더니, 그 뒤 2·3초만에 꽝하는 폭음과 함께 본인은 인력거의 옆에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 보아하니 총독의 마차는 이미 정거장 입구 앞을 달리고 있고, 전기 14,5명의 사람들은 죄다 당황한 표정으로 몰려 달아나면서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조선인이 유유히 인력거가 줄지어 서 있는 뒤쪽을 지나 정거장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 조선인의 모자는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에 떠오르지 않지만, 오른쪽 손에 양산을 들고 턱수염이 제법 길은 데다 반백(半白)의 50세쯤 되는 당당한 남자였다. 나는 이 조선인이 범인인 것으로 생각하고 뒤를 미행(尾行)하여 정거장 입구 앞까지 가서, 제복 착용의 일본인 같이 보이는 순사에게 체포하라고 부탁했으나 응해주질 않았다. 전기 순사가 다시 일본 ‘하오리’를 입은 신사를 데리고 왔으므로 본인은 다시 체포해 줄 것을 당부했으나 자기들은 관계 없노라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떠나고 말았다.

본인은 남대문통(南大門通)의 두 운송점(運送店)이 있는 곳까지 와서 뒤에 몰려 있는 군중들에게 떼밀려 일단 전기 조선인의 행방을 놓치고 말았으나,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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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방면으로 쫓아가, 구어성좌(舊御成座)의 골목에서 예의 조선인이 오른손에 양산, 왼손에 타월을 가지고 남대문통의 인도(人道)를 걸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곤 얼마뒤에 통행인을 통해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본인은 전기 조선인이 폭탄을 던지는 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전기 조선인을 범죄자로 단정한 것은 혹시 착요였지 않았나 싶은 생각에서 그냥 역(驛)에서 되돌아 오고 말았다. 그러나 이 조선인은 앞서 검사정(檢事廷)에 만난 범인과 틀림없는 인물이었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동상 증인(證人) 유마영이(有馬英二) 신문 조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하오 5시경 총독 일행(一行)이 남대문역 귀빈실로부터 나와 마차에 타려할 때, 본인은 그 역의 다방 앞 약 3보(步) 지점의 귀빈실 목책(木柵)과 인력거 사이의 약 2m 넓이의 공지(空地) 뒤쪽에 서 있었는데, 거기에는 거의 40명 정도의 구경군이 모여 서 있었다. 그런데 본인의 오른편 앞에 서 있던 조서인이 직경 2치(寸)쯤 되는 타원형의 검은 물체를 총독 쪽을 향해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목책 뒤로 물러서자, 약 2,3초 뒤에 쾅하는 폭음이 나더니 모든 군중들이 와 뒤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본인은 조선인이 던지는 것이 폭탄임을 알았다. 그때는 그 조선인의 소재(所在)는 알 수가 없었으나 나의 왼쪽에 있던 사람들이나 인력거 뒤 쪽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정거장 입구를 향해 피해 달아나는데도 그 중 한 사람의 조선인이 유유히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과연 범인(犯人)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으나 나의 뒤 쪽에서 역(驛) 보이가 범인이 달아나고 있다고 소리쳤다. 그 조선인은 하얀 한복을 입은 나이 50세쯤 보이는 사람이었다.

피고 강우규는 조선인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당시 입수염, 턱수염이 약 3치(寸)쯤 길어 있었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동상 증인(證人) 장강경작(長岡敬作) 신문 조서 중, 총독 재등은 대정 8년 9월 2일 하오 5시 10분,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귀빈실로 들어가 그앞 목책 곁에 세워 둔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북쪽을 향해 놓여 있었는데 총독과 총독부인들이 승차하자 이 마차는 오른편으로 꺾어 동쪽을 향해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의장병(儀仗兵)의 지휘관이 무언가 명령하자 동시에 마지막 예포(禮砲) 9번째가 울린 뒤 약 1분쯤 지나 쾅하는 폭음이 들렸으므로 뒤쪽으로 돌아다보자 총독이 타고 있는 마차 뒤쪽 약 7보(步)쯤의 거리, 즉 이 마차와 정무총감(政務摠監)의 마차 중간지점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 폭탄을 던진 것을 알았다. 누가던진지는 알 수 없었으나 틀림없이 인력거가 줄지어 서 있던 방면에서 온 것이 분명므로 나는 곧 주차장(駐車場)으로 뛰어들어 범인(犯人)을 물색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총독의 마차쪽을 얼른 쳐다보자 몹시 혼란상태에 있었으므로 이것을 정리하여 간신히 총독 마차가 무사히 통행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본인이 현장을 조사한 결과 폭탄이 떨어진 곳은 직경 약 5치(寸)쯤의 구멍이 패여 있고, 그 폭 들어간 구멍의 동쪽과 남쪽에 콩크리이트 돌멩이가 보였다. 폭탄은 그 돌멩이에 맞아 반사하여 파편(破片)이 흩어진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 서쪽 및 북쪽에 있던 사람들은 부상을 당하고, 반대쪽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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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자들은 부상을 입지 않았다. 본인이 서 있던 지점과 폭탄이 떨어진 지점은 약 7,8보(步)의 거리였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동상 증인(證人) 이등무언(伊藤武彦)에 대한 신문 조서 중, 재등 총독은 대정 8년 9월 2일 하오 5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동역(同驛) 귀빈실에 들렀다가 미리 준비 중의 마차를 타기 위해 입구로 나와, 의장병의 경례(敬禮) 또는 나팔 취주(吹奏)가 끝나기를 기다려 마차에 올라, 뒤쪽 좌석 오른편에 정좌(定座)하고, 본인은 그 맞은편에 앉았으며 마지막으로 총독부인(夫人) 총독의 왼편쪽에 앉자 마차는 서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침 마차가 다방 입구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마차 뒤쪽에서 캐다란 폭음이 들리고 이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이 군중들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총독은 나에게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렸군”하고 말하기에 본인은 비로소 폭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마차는 진행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관저(官邸)에 도착했다. 도착 후 총독은 자기 허리께에 충동을 받았다고 하기에 조사해 본 결과 흰 하복(夏服) 오른쪽 허리춤의 혁대(革帶) 부분에 구멍이 뚫려 파손되어 있고, 거기서 조그마한 탄편(彈片)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차의 뒷부분에 대여섯 군데 탄흔(彈痕)이 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관통하여 총독과 본인 사이에 있는 의자에 탄편의 박혀 있고, 하나는 마차의 등받이 부분에 명중(命中)하고 있었다는 요지의 공술기재.

검사의 검증 조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폭탄 피해(被害)의 현장은 남대문 정거장 앞 광장(廣場)으로서, 탄흔(彈痕)을 받은 곳은 동정거장 귀빈실 앞 목책(木柵) 동남쪽 약 8보(步)가량 떨어진 지점이다. 탄흔의 깊이는 7분(分), 직경 3치(寸) 5분(分), 부정(不定) 국화형(菊花形)을 띤 요함지(凹陷地) 위에 나 있으며, 이 검증 때 전기 요함지에는 아직도 화약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 동남쪽 귀퉁이(총독의 마차와 면접한 위치)에는 직경 약 1치(표면에 노출되어 있는 부분)의 약간 깊이 파묻인 돌이 있었고, 전기 요함부(凹陷部)에서 반대 방향으로 많은 토사(土砂)를 날림 형적을 보아, 전기 돌의 동남쪽, 말하자면 총독의 마차 방향으로 탄편(彈片) 및 토사가 날으는 것을 이 돌이 막고 있었는 듯하다. 목책 부근, 다방 앞, 1·2등 대합실 앞 등에 주먹 크기 또는 미농지(美濃紙) 넓이의 혈흔(血痕)이 각처에 산재해 있고, 땅위를 오손(誤損)하고 있는 자취를 볼 수 있다. 귀빈실 울타리 앞과 다방 앞에 탄편(彈片)으로 보이는 물체가 6개쯤 있기에 이것을 압수한다. (대정 8년 영제1118호의 1).

이윽고 경성부태화정(太和町)총독관저(官邸) 소속 차납고(車納庫)에서 흉행(兇行)시 재등 총독이 타고 있던 마차를 검증한 바, 마차는 목조 어두인 사륜마차로서 마차에 10개의 탄흔이 있고, 그 중 제8 및 제10은 포장에 해당되는 부분이고, 또 하나의 다른 탄편(彈片)이 3개 처를 뚫고 나가고 있다. 제1, 제3, 제6의 탄흔은 그 모두가 마차의 내부를 관통하고 있다.

입회인(立會人)인 흉행 당시의 마부 학곡외이랑(學谷外二郞)의 설명을 들을진대, 당시 의자 밑을 관찰한 곳을 경계로 하여 앞쪽을 보고 오른쪽에 총독이 왼쪽에 동 부인(夫人), 그 맞은 편에 이등(伊藤) 비서관이 각각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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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있었다. 전기 관통의 탄편은 총독과 부인과의 사이를 지나 앞쪽으로 등받이(살을 보고 왼쪽)를 뚫고 총독의 오른편에서 비스듬히 앞으로 날아갔고, 또 그것보다 조금 아래쪽의 등받이를 뚫고 나간 또 하나의 탄편은 마치 총독의 뒤편에 해당하는 위치로서 몹시 위험했으나, 탄편은 우선 포장을 뚫고 마차의 외곽(판자의 부피 약 7푼)을 뚫은 뒤 다시 두터운 선(線)이 들어있는 등받이(그부터 약 3치)를 뚫고 나갔기 때문에 그 탄력(彈力)이 줄어 간신히 등받이를 관통한 데 불과하고 총독과전기 등받이의 중간에 떨어진 것 같다.

현장에서 문제의 마차 뒤쪽에 박힌 탄편 1개와 포장 안에 떨어져 있던 탄편 1개를 압수(전자는 대정 8년 영제128호의 5, 후자는 동호(同號) 4) 처분했다는 기재(記載).

경성 본정(本町)경찰서 경부(警部) 오촌진(奧村進)의 보고(대정 8년 9월 3일부)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 앞 광장에서 폭탄 파편 1묶음(대정 8년 영제1118호의 6을) 수집하였다는 취지의 기재.

동상(同上) 보고서(동월 5일부) 중, 그해 9월 2일 남대문역전(驛前)의 폭탄사건 때, 경성 본정(本町)경찰서장 소모전십태랑(小牟田十太郞)의 허벅지에 박힌 탄편 1개(대정 8년 영제1118호의 7) 및 남대문통(南大門通) 2정목 조일통신부원(朝日通信部員) 귤행귤(橘香橘)의 복부에서 재취한 탄편 1개(동호 8)를 각각 압수하여 돌아왔다는 취지의 기재.

감정인 도전국언(島田國彦)의 폭탄감정서 중, 본건 압수의 증제1호 제4호 내지 제8호의 철파편(鐵破片)을 갈라 감정한 바, 폭탄의 모양은 구상(球狀)이 아니고 약간 길죽한 달걀 모양이었으며, 단경(短經) 약 5.60mm, 장경(長經) 약 90mm, 내부 부피 5.6mm, 외부에 깊이 약 2mm쯤 되는 서너가닥의 옆골(橫滑), 열한둘의 세로골(縱滑)이 나 있는 주철제(鑄鐵製) 탄체(彈體)를 이루고 있었다.

탄체의 외부에는 부피 약 4.5mm 및 6mm의 돌기부(突起部)를 이루고 있고 또 후자(後者)에는 직경 2mm 정도의 작은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안정 장치 또는 발화 장치의 1부는 폭탄 의부에 있는 것같고, 폭탄의 위력은 그 폭발점에서 10m 내외의 거리에서 인축(人畜)을 살상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영국식(英國式) 예화(曳火)수류탄은 그 형상의 크기, 외면에 나 있는 골(滑)의 간격 및 깊이가 다같이 전기형상(形狀)과 일치하였고, 외부의 돌기(突起)도 역시 전기의 것과 근사하며 구조 위력 또한 전기 생질과 동일하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경성 본정(本町)경찰서 경부 오촌진(誤村進)의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전폭탄사건 부상자 명단 보고서중, 판시와 같은 부상자가 있었다는 취지의 기재.

의사(醫師) 뇌호결(瀨戶潔)의 귤향귤(橘香橘)에 대한 진단서 중, 복부 좌계륵(左季肋)밑에 부정형(不定形) 직경 약 푼 2푼(分)의 관통창(貫通創)이 나 있었고, 복강(腹腔)을 통해 개복술(開腹術)을 한 결과를 정사(精査)컨대, 복강 내보는 혈액 삼출액(滲出液)이 꽉차 있고, 강상(腔傷) 중앙부에 직경 약 2푼(分)의 관통창(貫通創)이 나 있다. 장관내(腸管內)뿐만 아니라, 반대측 장벽(障壁)을 뚫고 나간장간(腸間)은 중앙부에 손바닥 크기의 장막하(腸膜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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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혈이 있고, 그 좌우에 약 8푼(分)쯤의 사입구(射入口)와 사출구(射出口)를 볼 수 있었다. 결장(結腸) 근처의 약간 왼쪽에는 장벽관통창(障壁貫通創)이 나 있고, 그것은 장관구(腸管口)에 통해 있다.

그 밖에 왼쪽 허벅지 아래쪽 바깥, 왼쪽 앞 어깨, 왼쪽 허벅지 윗쪽에 철편의 창상(創傷)이 있었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예심판서의 증인 뇌호결(瀨戶潔)의 신문조서 중, 귤향귤(橘香橘)은 대정 8년 9월 2일 하오 5시경 남대문역전에서 폭탄으로 부상을 당해 입원 치료 중이었으나 그해 11월 10일 사오 9시 사망했다. 사망의 직접 원인은 폐렴(肺炎)이나, 이 폐렴은 복막염의 결과에서 온 것으로, 결국 철편(鐵片)이 복부에 사입(射入)하였기 때문에 장(腸)에 결손(缺損)이 생겨 그 내용물을 흘러 복막염을 일으키게 된 것이고, 개복(開腹)의 결과 폐렴을 일으켜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는 취지의 공술기재(記載).

의사 전중환치평(田中丸治平)의 말 홍우이랑(末弘又二郞)에 대한 진단서 중, 오른쪽 허벅지 관통맹관창(貫通盲管創) 외 두 군데의 창상(創傷)이 있었다. 치료 중 외상성(外傷性) 패혈증(敗血症)으로 인해 대정 8년 9월 11일 하오 2시 20분 사망했다는 취지의 기재.

예심판사의 증인 전중환치평(田中丸治平)에 대한 신무조서 중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은 대정 8년 9월 2일 폭탄을 맞아 입원 치료 중 그달 11일 하오 2시 30분 사망하였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동상(同上) 증인 산구연남(山口鍊男)에 대한 심문조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 귀빈실 앞에서 총독의 마차가 12.3m 진행했을 무렵, 본인의 왼쪽 13.4m 지점에서 무언가가 폭발하여 나는 그 자리에서 넘어졌는데 폭탄을 맞은 것으로 자각하자 곧 도기병원(島岐病院)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그날 밤 총독부 의원(醫院)에 입원하여 치료 중이라는 취지의 공술기재.

조선총독부의원(醫院) 의관(醫官) 산구연남(山口鍊男)에 대한 진단서 중, 오른쪽 폐첨부(肺尖部)에 폭탄창(爆彈創)을 입었기 때문에 앞으로 2개월간 입원가료해야 한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예심판시의 증인 소모전십태랑(小牟田十太郞)의 심문조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전에 있었던 폭탄사건으로 인해, 오른쪽 허벅지 두 군데와 왼쪽 허벅지에 두 군데 찰과상(擦過傷)을 입고, 오른쪽 귀의 고막에 파열상을 입었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동상 증인 김준지(金駿▼(氏/土))의 신문조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하오 5시경, 남대문역에서 재등 총독이 마차에 타려할 때, 마차의 왼쪽에 석류(柘榴)만한 크기의 검붉은 물체가 떨어져 내려와, 마차가 막 진행하려는 찰라 큰 폭음을 내며, 무언가 내 눈에 맞아 출혈(出血)이 시작됐다. 검붉은 물체는 폭탄이었고 그로 해서 눈에 부상한 것을 뒤에사 알았노라는 취지의 공술기재.

권오용(權五鎔)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 있는 폭탄 파열(破裂)로 인해 오른쪽 허벅지 윗부분 바깥쪽, 왼쪽 허벅지 윗부분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기재.

박정화(朴貞和)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에서의 폭탄의 탄편으로 오른쪽 정강이, 오른쪽 앞 어깨, 오른쪽 허벅지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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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의원(醫院) 부의관(副醫官) 아무정일(阿武政一)에 대한 진단서 중, 오른쪽 허벅지에 맹관(盲管) 폭탄창(爆彈創)을 입어 3주간 입원 가료를 요한다는 취지의 기재(記載).

박관식(朴寬植)의 시말소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의 폭탄사건 때, 폭탄으로 왼쪽 다리 정강이에 두군데 상처를 입고 3주간의 치료를 했다는 취지의 기재.

하원청태랑(河原淸太郞)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의 폭탄사건에서 폭탄 파열로 왼쪽 머리 왼쪽 손등에 부상을 당했다는 요지의 기재.

예심판서의 증인 구도행태랑(久渡幸太郞)의 신문조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폭탄 파열로 인해 오른쪽 손바닥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의사(醫師) 정상□(井上□) 구보요장(久保要藏)에 대한 진단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폭탄파열로 인해 오른쪽 허벅지에 자창(刺創)을 입었다는 취지의 기재.

동상(同上) 야진요태랑(野津要太郞)에 대한 진단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폭탄 파열로 인해 왼쪽 앞 어깨와 하퇴부(下腿部)에 자창(刺創)을 입었다는 기재.

안등우삼랑(安藤右三郞)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에 있었던 폭탄 파열로 오른쪽 어깨에 치료 4,5일을 요하는 창상(創傷)을 입었다는 요지의 기재.

무정연태랑(武井延太郞)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의 폭탄 파편으로 인해 1개월 치료를 요하는 창상(創傷)을 입었다는 취지의 기재.

의사 J.W. 하르스트와 W.P. 해리슨 부인(夫人)에 대한 진단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정거장에서 폭탄 탄편으로 왼쪽 어깨 뒷부분, 그 밖의 수개처에 부상을 당했다는 요지의 기재.

박성팔(朴聖八)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 귀빈실 부근 1,2m 지점에서 경비 중, 곧 폭음이 울린 다음, 걸어가려는데 양복바지에서 선혈(鮮血)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취지의 기재.

지광연(池光淵)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하오 5시경, 남대문역에서 폭탄사고로 오른쪽 머리, 왼쪽 손목 및 정강이 등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기재.

김태석(金泰錫)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의 폭탄 사고로 오른쪽 다리 정강이 왼쪽에 1주일의 치료를 요하는 창상(創傷)을 입었다는 요지의 기재.

이원승(李源昇)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의 폭탄사건으로 뺨(脥)에 3주일의 치료를 요하는 창상(創傷)을 입었다는 취지의 기재.

이관중준(伊關重俊)의 상황보고서(狀況報告書)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 귀빈실 밖의 폭탄 파열과 동시에 왼쪽 다리에 출혈이 있어 입원하여 철편(鐵片) 한 개를 뽑아냈으나 치료 3주일을 요한다는 취지의 기재.

서전국길(西田國吉)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폭탄 파열로 오른쪽 허벅지와 그 밖에 수개처 부상을 당했다가 그해 11월 14일 간신히 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취지의 기재.

삼하삼조(森下三助)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 역전의 폭탄 파열로 좌우 양 발에 창상을 입고 그해 10월 15일경 간신히 완치되었다는 취지의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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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호남(山內虎男)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의 폭탄 파열로 인해 오른쪽 발등에 부상을 당해 그해 10월말경 나았다는 취지의 기재.

야방을삼랑(野方乙三郞)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총독이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열대 폭음이 울리고 동시에 오른쪽 발에 선혈이 솟아올라 조사한 결과 철편 3개가 박혀 있어 입원 가료 중이라는 취지의 기재.

성대용(成大鏞)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폭탄파열사건으로 왼쪽 정강이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기재.

근등귀길(近藤龜吉)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폭탄파열사건으로 오른쪽 발 관절에 부상을 당했다는 취지의 기재.

예심판사의 증인 암미무(岩尾茂)의 신문조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하오 5시경 남대문역폭탄사건으로 오른쪽 다리에 관통창상(貫通創傷), 오른쪽 발 사이에 맹관총창(盲貫銃創)을 입었다는 취지의 공술기재.

박홍식(朴弘植)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폭탄사건으로 어깨 겨드랑 밑과 왼쪽 다리에 부상을 당해 약 2개월의 치료를 했다는 취지의 기재.

엄관서(嚴寬瑞)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 다방 앞에서 폭탄 파열로 왼쪽 다리에 부상을 당해 그해 10월 7일에 전치했다는 취지의 기재.

박재인(朴在仁)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폭탄사건으로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당해 약 1개월의 치료를 요했다는 취지의 기재.

황춘엽(黃春燁)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전의 폭파사건으로 왼쪽 허벅지 윗쪽, 오른쪽 허벅지 아래쪽에 부상을 당해 치료에 약 1개월 이상을 요했다는 취지의 기재.

이장룡(李長龍)의 시말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총독의 마차가 5.6보(步) 진행하기 시작하였을 때 갑자기 포성(砲聲)과 연기가 솟아나고, 내 왼쪽에 탄편이 떨어져 왼쪽 다리 윗쪽에 창상을 입혀, 약 1개월 이상의 치료를 요했다는 취지의 기재.

예심판사의 증인(證人) 양창화(楊昌華) 신문조서 중, 대정 8년 9월 2일, 남대문역전의 폭탄파열사건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접골(接骨) 치료를 했으나 대정 9년 1월 19일까지 자유로 보행할 수 없다는 요지의 공술기재(供述記載).

및 압수(押收)한 증제1호, 증제4호 내지 8호의 각 탄편(彈片), 증제10호의 타월, 증제12호의 명주천 조각, 증제13호의 파나마모(帽), 증제28호, 증제39호의 승선표(乘船票), 증제35호의 전보원서(電報原書)에 비추어 이것을 인정한다.

법률에 비춰보건대 피고의 소위중(所爲中) 남의 인체(人體)를 해치려는 목적에서 폭발물을 사용한 점은 폭발물 취체벌칙 제1조에 해당하여 사형(死刑) 또는 무기(無期) 내지 7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禁錮)에 처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살인기수(殺人旣遂)의 점은 각동법조(各同法條) 및 동법 제203조에 해당하고, 이것은 1개의 소위(所爲)로서 수개(數個)의 죄명(罪名)에 저촉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법 제64조 제1항 전단, 제10조에 의해 가장 무거운 귤향귤(橘香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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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한 소위에 대해 과(科)해야 하며, 사형 또는 무기형,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야 한다.

그리고 폭발물 취체벌칙 제12조, 형법(刑法) 시행법 제22조, 형법 제10조에 의해 전게(前揭) 두 죄명을 비교하여 폭발물 사용에 관한 죄를 무겁게 보고 이에 따라 소정형(所定刑) 중, 사형을 선택하여 피고 강우규(姜宇奎)를 사형에 처할 것이다.

다음 피고 최자남의 소위는 폭발물 취체벌칙 제5조에 해당하는 소정형(所定刑) 중,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택하여 그 범위 내에서 피고 최자남을 징역 3년에 처할 것이다.

압수물품 중, 증제1호, 증제4호 내지 8호의 각 탄편(彈片)은 범인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범죄행위를 조성한 것이므로 형법 제19조 제1항 제1호 및 제2호에 따라 몰수하고, 그 외의 것은 몰수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형사소송법 제202조에 따라 각 소유자에게 환부(還付)해야 할 것이다.

공소소송비용(公訴訴訟費用) 금 50원은 동법 제201조에 따라 이것을 5분하여 그 3을 피고 강우규의 부담으로 하고 그 2를 피고 최자남의 부담으로 한다.

그리고 예심에서의 증인 김□진(金□眞) 소환에 요한 공소소송비 금 1원 30전은 형사소송법 제201조 제1항에 따라 피고 강우규와 원심 피고(原審被告) 허형(許炯)과 함께 반반(半半)으로 부담하고, 참고인(參考人) 강진원(姜津源) 환문(喚問)에 요한 공소소송비용 금 3원 70전은 형사소송법 제201조 제1항에 따라 피고 강우규의 부담으로 하지만 본건은 피고만의 공소(公訴)이기 때문에 원판결을 변경하여 피고 강우규에게 불리(不利)하게 할 수 없으므로 이 점에 대해 본원(本院)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므로 원판결 중, 피고 최자남에 대한 부분은 전기 판정(判定)과 동일한 취지에서 출발하여 그와 상당(相當)하지만, 강우규에 대한 부분은 조선총독 재등실 이외의 자(者)에 대한 행위를 상해치사(傷害致死) 또는 상해의 범죄로서 각각 법조(法條)를 적용처단(適用處斷)함은 실당(失當)한 것으로 피고 최자남의 공소(控訴)는 이유 없고, 피고 강우규의 공소는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전자(前者)에 대해서는 형사소송법 제161조 제1항, 후자(後者)에 대해서는 동법조 제2항에 따라 각각 주문(主文)과 같이 판결한다.


판결 대정(大正) 9년 형상(形上) 제58호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原面) 영덕리(靈德里) 68번지 재적

중국 길림성(吉林省) 요하현(饒河縣) 신흥동(新興洞) 거주

농업 피고인 통칭명 찬구(燦九)

강우규(姜宇奎) 66세

우(右)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피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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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에 대해, 대정 9년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覆審法院)이 선고(宣告)한 판결에 대해 피고인으로부터 상고신립(上告申立)이 있었기 조선총독부 검사 초장임오랑(草場林五郞)의 의견을 듣고 아래와 같이 판결한다.

주문

본건 상고(上告)는 이를 기각(棄却)한다.

이유

상고 취지는, 본 피고인은 살인피고 사건에 대해 대정 9년 4월 28일 상고신립에 있어 다음과 같은 취지서를 제출하였다.

1. 신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살해하려고 한 것은 전총독 장곡천(長谷川)이 조선에 재임한 지 장기간에 걸쳐 조선사정에 정통하였고, 선일(鮮一) 동화정책(同化政策)을 시행하여 바야흐로 통치의 결실을 거두려고 했다.

그러나 거년 3월, 저반 내외지(內外地)에 산재하고 있는 조선 2천만 인민이 일심동의로 조선독립운동을 일으켜, 이로 말미암아 살륙당한 자가 몇 천(千), 몇 만(萬)에 달했으나 사방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동립운동은 연면(連綿)히 끊일 사이가 없음은 그 국민성(國民性)의열성에서 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보더라도 조선통치는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단호히 사직(辭職) 귀국(歸國)했다.

그런데 신임(新任) 총독 재등실(齋藤實)은 이게 어떤 인물이며, 무슨 승산(勝算)이 있어서 내임(來任)하는 것인가?

신임 총독 재등실의 내임(來任)은 실로 이것이 천의(天意)에 위배하며, 세계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와 인도정리(人道正理)로써 성립한 평화회의(平和會義)를 교란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늘의 계명(誡命)을 범하여 조선인민 2천만을 궁지에 몰아넣어 그 어육(魚肉)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의 천황은 성덕(聖德) 갖추고 있기 때문에, 천의(天意)에 순종하고 세계대세인 평화회의에 동의(同意)하여 신임 총독 재등실에게 칙명(勅命)을 내렸다.

그 칙명 중에 동양대세(東洋大勢)를 영구히 보호하라는 성지(聖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동양대세의 보호는 평화에 있으며 분쟁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동양삼국(東洋三國)의 평화성립을 설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등실의 신임 총독은 헛된 욕망에 눈이 어두워 성지(聖旨)를 어겼다. 그리고 분쟁을 유일의 능사(能事)로 삼아 동양 대세를 영원히 보호할 평화의 서광(曙光)을 무찌르고 말았다.

이 큰 죄를 어디다 비길까! 따라서 하늘과 세계에 대해서는 죄인이요, 자국(自國)에 대해서는 역신(逆臣)이며, 조선에 대해서는 간적(奸賊)이요, 동양의 악마이다.

그런고로 이와 같은 악마를 살해하여 세상에 내돌려 동양의 증거물(證據物)로 삼고, 존엄한 대일본제국에는 그와 같은 인류 악마를 다시는 생육(生育)하지 않게시리, 그리고 그와 같은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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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은 존재는 되도록 태평양(太平洋)의 대해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대책을 강구할지어다.

1. 폭발물을 어느 러시아인(人)과 비밀리에 매매할 때, 피차 언어가 통하지 않으므로 그 자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시늉을 보고 그 사용법을 알았고, 오직 개인을 목적으로 한 것뿐이므로 폭탄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구입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변경으로부터 경성(京城)으로 오는 도중에 이 물품을 타인에게 보이거나 서로 말을 주고받은 사례(事例)는 한 건도 없다. 이것은 심증(心證)의 사실로서 거짓일 수가 없다.

1. 각급법원(各級法院)에서의 사실조사(事實調査)때, 그대는 러시아 지방에 다년간 체재하고 있었다는데 왜 폭탄의 명칭과 그 위력을 모르냐의 질문이나 이 상품은 시장(市場)에 방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가격이 얼마인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군물(軍物)인 폭탄의 형상(形象)과 위력을 어떻게 알겠느냐? 다만 유럽(歐州) 전쟁 때 어느 신문을 보았더니 독일(獨逸) 군인이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 적국(敵國) 도시에 투하하여 그 도시민을 살륙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국 런던에서도 고층 건물의 상층(上層)을 파괴하고 야간은 전등(電燈)을 끄고 등화관제(燈火管制)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인의 생각으로는 폭탄이란 것은 한낱 사기 그릇이나 물항아리나, 아니면 커다란 호박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듯 쬐그마하고 어린애 주먹만한 것이기에 고작 한 사람쯤을 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물품의 명칭이 폭탄이란 것도 남대문역에서의 이 사건이 있은 후, 매일 신문지상에서 보고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남대문역에서 총독에게 폭탄을 던질 때까지 개인(個人)을 표적으로 하여 투척한 것이 사실이며,

1.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광석동(廣石洞) 1번지 최자남(崔子男)의 집에 투숙 중, 야반(夜半)주인 최자남을 일깨워, 이번 나의 소행은 독립운동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신임 총독을 살해하기 위한 것이다 하면서, 가지고 온 폭탄을 최자남에게 소상히 보여준 뒤,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사실을 덧붙여 이 폭탄을 최에게 맡겼다는 것은 사실 무근(無根)이다.

본인(本人)이 동품(同品)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 명칭이니 위력을 남에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최자남은 원래 무학무식(無學無識)한 자로서 잡화 집신 장사에 불과한데 어떻게 이와같은 모험비밀을 경솔히 그에게 털어놓겠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그 누구나 사상이 있는 자라면 이와 같은 경솔한 짓은 하지 않을 것쯤은 다 아는 터이다. 사실인즉 본인이 그 집에 투숙한 때도 그 집 비밀장소에 이것을 숨겨두고 이 집을 떠날 경우에는 의복 속에 깊이 감추어 풀어볼 수 없도록 만들어 주인에 맡겨 숨겨두게 하였다.

본 피고가 상경(上京)하여 신임 총독의 내임(來任)의 날자(日字)를 소상히 알은 뒤 최자남에게 맡겼던 옷가지를 찾아 상경한 것도 거짓아닌 사실이다. 그런데 동범인(同犯人) 최자남이 형장(刑杖)을 이겨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여 허황한 무고(誣告)를 중얼거린 것도 그가 말하기로는 잠간 동안의 보명책(保命策)으로 한 것이며, 실은 강우규의 독립운동의 설(設) 또는 폭탄물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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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들은 바 없고, 다만 의복으로 싼 보(褓)를 맡았을 뿐이었고, 이것조차 강우규가 경성(京城)에서 돌아오자 이내 돌려 주었을 따름이다. 그 밖에 강에게 조석 식사를 제공한 죄밖에는 없으므로 소인(小人)의 죄에 대해 재판장은 관대한 처분이 있기를 바란다고 변명하는 것을 들었다.

최자남이 폭탄을 맡을 때 이것을 견문(見聞)한 뒤에 맡은 것이 아니다.

1. 신임 총독 재등실(齊藤實)의 착임(着任) 당일, 본 피고인이 투척한 폭탄은 실은 신임 총독을 살해하려는 것이었지 그 밖의 다른 사람을 살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곁사람의 사상(死傷)은 이것을 비유(譬喩)한다면, 총독 재등실의 연회(宴會)에 본인이 호주(好酒)를 한병 선물했더니 자기는 이것을 마시지 않고, 참석인에게 마시게 하여 취한 나머지 그자에게 누구의 술을 마셨느냐 하고 묻자, 그 자 왈(曰), 총독의 술을 마셨노라고. 이 비유와 같이 곁사람의 사상(死傷)이 본 피고인에게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것 뿐만 아니라, 본건에 대해 총독 재등실은 그의 부인과 함께 남대문역에서 발생한 사상자(死傷者)는 그 대다수가 우리 때문에 이와같이 되었노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해결책은 명확한 것으로서 신문지상에까지 게재된 것이다.

1. 위에 기록한 바와 같이 피고인은 일구이언(一口二言)한 적이 없고, 사사건건 그 변명하는 바가 동일한데도, 각급(各級) 법원(法院)은 조서 중의 사실은 성찰치 않고, 황언무고(詤言誣告)임이 분명한 최자남의 가언(假言)을 증거로 논고(論告)하였을 만뿐 아니라 율법(律法)에 관해서도 죄명(罪名)은 하나인데도 형(刑)은 여러 종목으로 나누고 있다. 죄의 경중(輕重)에 대해서도 말할 것 없고, 본 피고인이 목적한 바 죄 많은 총독 재등실은 지금도 생존하고 있음에도 만사를 제처놓고 본 피고인을 사형에 처하는 것, 이것을 공의(公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억울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본인이 이와 같이 신립(申立)하는 것은 사실상 죽어야만 한다면 죽음을 사양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공의(公議)에 따른 심판을 보고 싶어서 그러노라는 데 있다.

그러나 원심(原審)은 원판결문에 게재한 바 각 증거에 따라, 피고가 조선총독 재등실을 살해할 것을 계획하여 원판시(元判示)와 같이 폭탄의 안전판(安全辦)을 뽑아 폭탄 파열로 총독이 타고 있는 마차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번연히 예견(豫見)하고, 또 마차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것을 알면서 10m 내왼의 거리에서 차 위에 총독 가슴을 겨냥하여 폭탄을 던진 것이다. 그것이 공교롭게도 마차에서 약 7보(步)가량 떨어진 앞쪽에 폭탄이 낙하하여 꽝하는 굉음과 함께 폭탄이 파열하여 탄편(彈片)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 그 중 몇 개의 탄편이 전기 마차에 부딪쳐 하나가 마차 뒤쪽을 관통하여 총독의 허리에 찬 검대(劍帶)를 손상했을 뿐, 그 몸은 아무 손상을 입지 않았다. 다만 비산(飛散)한 탄편으로 인해 그 주위에 모여있던 귤향귤(橘香橘)과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이 중상을 입고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밖에 판시(判示) 각 피해자는 중경상(重輕傷)을 입었으나 사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서 이 사실에 따를 진대, 피고의 소위(所爲)는 원심 적용(適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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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信條)에 해당하는 범죄를 구성하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원심이 이 법조(法條)를 적용하여 피고를 사형에 처한 것은 적절한 처사다.

논지(論旨) 중 피고가 전 조선총독 장곡천(長谷川)은 조선 통치가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사직 귀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임 총독 재등실이 내임(來任)한 것은 세계의 대세(大勢)인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와 인도정리(人道正理)를 표방하는 평화회의를 교관시켜 조선인 2천만을 궁지에 몰아넣고, 동양의 대세에 배치하여 평화의 서광(曙光)을 억제하는 자(者)이므로 조선민족 2천만을 대표하여 신명(身命)을 내던지고 국권회복(國權恢復)과 독립을 위해 총독에게 폭탄을 투하했노라고 진변(陳辯)했다.

이 점에 있어서 피고는 자기의 사실(事實)을 진술하고 자기의 의견에 따라 자기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데 불과하므로 그 이유가 성립치 않으며, 피고가 자신이 사용한 폭탄이 단지 한 사람을 살해할 수 있으나 많은 대중을 살상하는 위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것을 투척한 것은 단순히 총독 한 사람만을 죽일려는 것이었다. 피고가 이런 사정을 말한 뒤 폭탄을 최자남에게 맡겼다는 본인의 공술(供述)은 허황한 언설(言說)이다.

그런데도 원심(原審)은 이 자의 공술을 채용하여 판시 사실을 인정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점은 자기의 사실을 진술하고 원심의 직권에 속하는 증거(證據)의 취사(取捨) 및 사실인정을 비의(非議)하는 것으로서 이유가 없고, 피고의 총독 외에 다른 자를 살해할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진변(陳辯)하는 점은 비록 피고가 이것을 원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원판시(原判示)와 같이 피고가 폭탄의 파열로 총독이 탄 마차의 주위에 있던 자(者)들을 살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예견(豫見)하고, 또 그 주위에 사람들이 밀집해 있음을 알면서 차 위의 총독을 겨냥하여 폭탄을 던져 그 파열로 여러 사람을 사살한 이상, 그 결과에 대해서 판시와 같은 죄책(罪責)을 부담할 것은 당연하며, 그 결과의 발생을 바라지 안했다는 이유로 죄책을 회피할 수 없음은 물론임으로 논지(論旨)는 이유가 없으며, 게다가 재등 총독이 상금(尙今) 생존하고 있는데 사형에 처함은 마땅치 못하다는 점은, 비록 총독이 생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피고는 판시와 같이 남의 생명 신체를 해치려는 목적으로 폭발물을 사용하여 살인 기수(旣遂) 또는 미수(未遂)의 소위(所爲) 있는 이상 원판시 법조(法條)를 적용하여 사형에 처한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논지(論旨)는 원 심의 직권에 속하는 형(形)의 양정(量定)을 비의(非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유가 없다.

상고(上告) 추가취지(追加趣旨)는 본 피고인의 거듭 말하려는 바 과거에 견문(見聞)한 사실을 여기에 앙고(仰告)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제1심 법원에서 조사를 끝낸 뒤, 재판장에게, 이 법원은 조선총독부의 명령에 의해 설립된 것이냐, 또는 대일본제국 천황폐하의 칙령(勅令)에 따라 설립된 것인가를 알고 싶다는 물음에 대해, 재판장은 총독도 관계없고, 천황폐하도 관계없다고. 본인은 그렇다면 하늘이 명하는 법률에 따르는 것인가 하고 묻자, 재판장은 하늘도 우리 세계는 관계없고 우리 법률은 독립하여 성리된 것이다. 그러므로 총독 또는 황족(皇族)이라 할지라도 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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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이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총독 재등실을 호출(呼出)하라고 하자, 재판장 왈(曰), 이것은 검사국(檢事局)의 소고(訴告)가 없었어는 곤란하다 하기에 본인은 구두(口頭)로써 검사에게 소고하여 조서 기록에까지 기재하여 열석(列席)했던 검사에게 신립했던 것이다.

그러자 재판장은 총독에게 무슨 범죄가 있는냐고 묻기에 본인이 총독의 죄상(罪狀)을 여러 가지 신립하겠노라고 말하였으나, 법관이란 피고의 신립에 대해 시비를 판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리고는 폐정퇴석(閉廷退席)한 것은 이거 법관의 예의(禮儀)라 할 수 있겠는가? 실로 억울한 일이다.

또 재판장은 천황폐하 또는 총독에게 관계없이 황족 또는 총독에게 죄가 있으면 물론 단죄한다고 말한 것과, 본인이 호출을 청구한데 대해서는 불청(不廳)에 부쳐버리는 것은 이것 언사부동(言事不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 뿐만 아니라, 재판장은 하늘과 천황폐하는 우리의 법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법률은 독립적인 것이라 하지만 같은 우로(雨露)를 받들고 같은 성덕(聖德) 아래 있는 백성이 어찌하여 이렇듯 달라야 하는가? 이것을 도덕이니 의리(義理)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이 즉 억울한 일이다.

1. 본 피고인에 대한 복심법원의 취조(取調)가 끝나고 논고가 있은 뒤, 재판장은, 우리나라는 어떻한 나라냐? 이미 망한 나라는 나라라 할 수 없으며 동시에 일본의 인민이기 때문에 일본국(日本國)에 충성을 다해야 할 뿐이라고 하는 말도 이것은 어린애한테나 할 말이지 다 성장한 어른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

무릇 국가에 대해 일을 하는 이가 고금을 통해 왜 본인 뿐이겠는가! 예를 들어 서양국가에서 볼 수 있는 워싱턴, 나폴레온, 미스마아크 같은 사람들이 있고, 동양국가에서도 국가를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한 예가 없지 않다. 이등박문(伊藤博文)같은 자는 그의 소국(小國)을 위해 고심경영(苦心經營)하였다. 재판장이 말하는 바와 같이 전기 몇 사람이 만일 그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고 적국(敵國)에 복종했더라면 그 나라의 국민은 적국의 노예를 면치 못했을 것이고 그 국가가 오늘과 같은 세계의 일등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러기에 이들은 우리의 전감(前鑑)이 되지 않았는가!

이 뿐만 아니라, 국가의 흥망(興亡)과 시세(時勢)의 변천은 고금의 상사(常事)이다. 아아, 저 복심재판장(覆審裁判長)은 일시적인 안전(眼前)의 사태에 눈이 어두워져 전사 후사(前事後事)와 그 나라를 위해 고심경영한 이등박문의 치업을 생각지도 않고, 자기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려는 이 사람에게 이같은 멸시와 천사(賤辭)를 서슴지 않고 책망하는 것은 이 어찌 도덕 의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본인은 이런 소리를 듣자 슬픈 생각이 우러나는가 하면 한편 또 가소로운 감이 없지 않다. 이것 역시 억울한 일이다.

1. 거룩하다 동양(東洋)이여, 사랑스런 동양이여! 그 대세를 영원히 보호할 황인종(黃人種) 중에서 집권(執權)하는 자(者), 또는 그 인민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또 보호하지 않을 것이냐. 그런데 동양 대세를 영원히 보호하는 길은 어디 있는가 하면 말을 배우는 어린애까지도 분쟁에 있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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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있다고 말하리라. 만일 이렇다면 동양의 평화가 왜 급선무(急先務)라 하지 않겠는가. 한번 눈을 뜨고 저 백인의 실태를 주목해 보라. 세계 최대의 전란(戰亂)을 막고 평화회의를 성립시킨 후 4대국이니 5대국이니 하는 것은 죄다 사라지고, 모모 3국이 동맹(同盟)을 맺고 안연(安然)함을 볼 때, 그 내의(內意)는 반드시 지방적 관심과 인족(人族)의 관심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는 이런 모든 일을 깨닫고 동양의 태세를 영원히 보호하여야 한다는 어지(御旨) 중에 동양평화를 포함시켜 훈시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 무도덕, 무의리(無義理), 무륜(無倫), 무애(無愛)한 악마 재등실은 천의(天意)를 위배하고 성지(聖旨)를 거역하여 태평양을 건너 여전히 분쟁(紛爭)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서, 이른바 경찰 법률은 조선인민에게 그물을 던져 그 강산은 인민의 감옥으로 화해버렸다. 이런 가운데 처해 있는 그 누구가 원통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그 누구가 악감정을 품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애국성의(愛國誠意)와 배일열(排日熱)은 나날이 고조되어 얼마나 그 극에 달한 것일까!

어느 여인(女人)의 말에, 일본놈의 말을 들으면 뱃속에 있는 태아(胎兒)까지 요동한다고. 이 말은 인민들 중에서는 이미 절언(絶言)이겠지만 원래 당당한 4천래의 역사를 지닌 국가는 예의를 지키고 온 2천만 동포가 악마와 같은 그의 무리에 얼려 같은 동류가 되어서 살겠는가. 우리 동포 2천만은 한 사람 남김없이 싸우더라도 국권(國權) 회복과 자유독립을 전취할 것을 혈심동맹(血心同盟)해야 할 이 때, 본인도 투표자(投票者)가 되어, 또 동양의 원국(遠國)인 중국에 대해 말하더라도 각 신문지상에서 항상 보는 바와 같이 배자(排孝)라 하면 일자(日字) 뿐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일본을 배척함이 심상한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무릇 동양의 3국이라 하면 다른 나라 아닌 한 집안 한 형제라 할 수 있다. 만일 한 나라의 분쟁이 발생하면 그 나라는 어떻게 설 수 있을 것이며, 한 집안에 분쟁이 생길진대 어떻게 그 집안이 지탱해갈 것인가? 어느 누구는 예수 성인(聖人)의 말을 빌어 이에 비유하고, 혹은 형제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반드시 외모(外侮)를 받게 된다고 중국 성인의 말을 빌어 비유한다. 그런데 왜 오늘날에 있어서 동양평화에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는 바와 같이 동양 3국 중 일본은 세계의 대국으로서 일등국이다. 동양의 신문명(新文明) 선진국으로서 그 지위가 어떠냐 말이다.

원컨대 고등법원장이여! 고등법원장이여! 동양대세의 장래와 장래의 이해(利害)를 심사(深思)하고, 저 우매한 신총독 재등실이 이미 자기에게 주어진 영광에 만족하여 신속히 자국(自國)으로 돌아가 성지(聖旨)를 받들고 겅부 당사자들께 동양분쟁의 씨를 거두어 평화회의를 성립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동양 3국을 정립(鼎立)케 하여 견고히 자립한 후 완전한 정책과 완전한 사업을 일으킨다면 그 누구가 이를 감히 멸시하며 그 어찌 이것을 방어할 수 있겠는가? 과연 이와같이 되는 날에는 대 일본은 3국 중 패국(覇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의 그 영광은 어떻것이며 그 지위는 어떻겠는가!

원컨대 오늘 내가 하는 이 말을 저 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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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고 동양대세의 앞날을 위해 후회없도록 할지어다. 본인은 자국(自國)과 우리 동포를 위해 국권회복과 자유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고 하는데 있으나,

소론(所論)과 같이 제1심에 총독 호출(呼出)의 신립(申立)을 허용치 않고, 또 원심 재판장의 소론과 같이 설유(說諭)를 했다 하더라도 본건 판결에 아무런 위법(違法)을 야기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원판결의 당부(當否)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이것을 운위(云謂)할 이유가 없고, 그 밖의 논지(論旨) 중 거듭 진변(陳辯)한 바 있으나 그것은 오로지 정치 도덕에 관한 논의로서 추호도 상고적법(上告適法)의 이유를 삼기에 족한 것이 없다.

위의 설명과 같이 본건 상고는 이유가 없으므로 형사소송법 제285조에 의거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최●면과 백범 김구

최●면의 본명은 최중하. 그의 행적을 보자.

코리안 게이트라고 해서 박동선이란 사업가도 끼어있었죠. 참고로 최●면이 1978년(昭和53年)이후로 일본 중의원 회의록에서 '제2의 박동선'(일본의 박동선)이라 불리며 엄청나게 비판받았죠.

일본 중의원 회의록

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051/0082/05104150082009a.html

外務委員会 9号 昭和41年04月15日

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073/0080/07310180080003a.html
第3号 昭和49年10月18日

http://kokkai.ndl.go.jp/SENTAKU/sangiin/084/1020/08403301020005a.html
第5号 昭和53年3月30日

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084/0110/08406140110024a.html
第24号 昭和53年6月14日

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087/0380/08702080380008a.html
第8号 昭和54年2月8日

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087/0380/08702190380014a.html
第14号 昭和54年2月19日

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087/0384/08703020384004a.html
第4号 昭和54年3月2日

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087/0380/08703070380021a.html
第21号 昭和54年3月7日

장덕수 암살 당시 최중하의 역할

지면 문제상 생략하니 링크 주소를 가보면 됩니다.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6_1948_02_26_0030
딘, 장덕수사건진상 등 제문제 문답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6_1948_03_02_0110

제목 장덕수 암살사건 1회 공개재판 개정 (당시 상황이 나와있음)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6_1948_03_05_0140

제목 장덕수 살해사건 제4회 공판 개정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6_1948_03_11_0170

장덕수 암살 5회 공판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6_1948_03_08_0120
피고들이 조사기관의 질문에 대답한 진술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金錫璜(五四):본인은 국민의회 동원부장이다. 중국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대한임시정부 주석인 金九선생을 친히 1년 동안 모신 일이 있다. (조사관의 질문은 피고 金某와 金九와의 관계를 주로 진행되고 있다) 귀국 후는 별로 가까웁지 않았으며 1947년 11월31일 民代·國議합동문제로 찾아갔었다. 張德秀를 살해한 朴光玉을 본인은 모른다. 장씨살해문제에 관해서는 申一俊(피고)으로부터 1947년 7월경에 민족반역자를 숙청해야 한다는 말 가운데에 張德秀 裵恩希 安在鴻을 죽여야 한다고 들었으나 말렸다. 그후 辛은 金重穆이가 적임자라고 말했다. 며칠 후 金九선생을 찾았을 때 이런 말을 했더니 이놈들은 나쁜놈이야라고 했다.
이때 본인은 이 말이 張德秀를 죽이라는 직접명령은 아니나 원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고 辛·金에게 말했다. 그후 살해계획을 金九선생께 알렸더니 아 그런가라고만 하였다. 본인의 주머니속의 편지는 누구라고 이름은 안 썼으나 인편이 있으면 金九씨에게 보내려고 한 것이다.
趙尙恒(五六):국의 정무회 비서장이고 이번 사건에 관해서는 李박사 밑에서 소란스럽게 하고 있는 張德秀를 죽여야 한다고 말이 있었을 때 辛이 부하를 시켜서 혁명단을 조직하였다. 1947년 8월 중순경 京元旅館에서 金錫璜으로부터 金九선생의 지령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때 말 가운데에 좌익의 金元鳳 朴憲永도 죽여야 한다고 결의하였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장덕수피살사건 7회 공판에서 증인심문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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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구, 장덕수암살사건 8회 재판의 증인심문에서 관련성 부인

(변호인) 김중목 최중하 조엽을 아십니까?
(증인) 그는 내가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얼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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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덕수살해사건 제10회 군률재판 개정

제10회 오후 공판은 16일 하오 1시반부터 개정되어 배희범에 대한 증인심문이 끝난 다음 피고 박정덕의 증인심문이 시작되었는데 피고는 오직 조국완전독립에 목숨을 바치자는 것이 목적인 줄만 알고 한국혁명단에 입단하였다가 제3차 회합 때에 최중하와 박광옥이가 살인계획을 제안하므로 그후 곧 동단을 탈퇴하였다는 진술이 있고 민족반역자는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다는 CID에서의 진술을 부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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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덕수살해사건 11회 군률재판 개정

제11회 공판은 17일 상오9시30분에 개정되어 증인 최중하에 대한 변호인의 부대심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변호인)=대한혁명단 제3차 회합에서 요인암살을 계획한 일이 있는가?
(증인)=있소.
(변호인)=누구 누구를 살해하려 하였는가?
(증인)=안재홍·배은희·장덕수 그외 좌익요인 몇 사람이오.
(변호인)=그때 증인은 누구를 부담하였든가?
(증인)=장덕수씨를 부담하였소.
(변호인)=그 일이 진행되었는가?
(증인)=박정덕·조엽·김철이 탈당하고 또 내 자신의 건강으로 계획을 달치 못하였소.
(변호인)=그후 다시 그 일에 관하여 계획한 일이 있는가?
(증인)=그후는 국내정세가 달라졌으므로 장덕수 한 사람만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안재홍씨는 찬탁을 부르짖은 죄는 크나 그후 남북통일을 제창하게 되었으므로 용서하였고 배은희는 그 정치적 실력이 크지 못하므로 제거하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결정되어 오직 장덕수 1인을 죽이기로 된 것이었소.
그런데 12회 공판은 18일 상오 9시에 속개된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8년 0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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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덕수살해사건 12회 군률재판 개정

장덕수 살해사건 군률재판 제12회 오전 공개재판은 어제에 계속하여 최중하에 대한 심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학생연맹과 국민의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변호사의 질의 응답이 있은 다음, 검사의 심문으로 들어가 신일준 김중목에 대한 관계를 자세히 묻고 혁명단을 조직할 때에 어째서 생명을 극단의 말을 했느냐 하는 물음에 “동지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탈퇴하므로 매우 실망을 하였는데 그럴수록 더욱 굳게 뭉치기 위하여 생명이란 말을 쓴 것이지 다른 의미는 없다”고 대답한 다음 10분 휴정 후 다시 검사로부터 “혈서 서약서는 왜 김구씨에게 갖다 주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조선학생이 아직 독립운동정신을 상실치 않았다는 것을 독립운동을 하는 최고 영도자 김구씨에 전달하여 기쁨을 드리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장덕수씨를 민족반역자로 규정한 것은 3천만이 다 원하고 있었으니 그중의 한 사람의 나도 원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내가 직접 살해하였더라면 인간적으로 애석할 일이었을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죽인 이상 별로 애처롭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한 후 이날 오전의 심문을 끝마치고 오후에 계속할 것을 선언하고 휴정하였다.
(경향, 조선, 1948. 3. 19)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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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덕수살해사건 제14회 군률재판 모두 공판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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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덕수살해사건 15회 군률재판 오후 공판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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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덕수살해사건 17회 군률재판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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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덕수살해사건 18회 군률재판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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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덕수 살해사건 제19회 군률재판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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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덕수살해사건 제20회 군률재판 개정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6_1948_04_01_0210

제목 장덕수살해사건 피의자 8명에게 사형 언도
오랫동안 세인의 이목을 끌어오던 장덕수 살해사건 군률재판 공판은 지난 3월 2일 개정된 이래 한달동안 무려 21회에 걸쳐 검사와 변호인의 논박이 거듭되어 오던 바 1일 드디어 그 마지막 공판으로 다음과 같은 언도가 내리어 종막을 보게 되었다.
금석황(54) 교수형 조상항(56) 교수형 신일준(36) 교수형 손정수(58) 교수형 금중목(38) 교수형 최중하(24) 교수형 박광옥(24) 교수형 배희범(22) 교수형 조엽(23) 징역 10년 박정덕(25) 징역 10년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06_1948_04_22_0110

제목 장덕수살해사건 군률재판에 대한 하지의 특별조치 발표

1) 박광옥 및 배희범의 사형은 승인하나 그 집행은 추후 재심할 시까지 보류함
2) 김석황·신일준·김중목·<최중하>의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함
3) 조상항 및 손정수의 사형은 10년형으로 감형함
4) 조엽 및 박정덕의 10년형은 5년형으로 감형함
 

김구의 거짓말과 달리 최●면(최중하)과 그는 잘 아는 사이었습니다.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197509060058


윤한구 (보전·황해도출신) 를 대장으로 하여 대원은 최중하(연전·강원도·현이름은 서면·동경한국연구원장) 이병택 (경성대·경기도) 유영배 (보전·전남도) 송재섭 (보전·충청도) 김석렬(법전·함경도) 박갑득 (연전·함경도) 등 남북한출신이 혼합된 20여명.
윤한구대장은 『우리의 결행을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얘기를 하면 우리는 못 가게되오』하면서 비밀활동을 요망했다.
이들은 다음날 평양행을 결정하고 이른 아침 서울역에 모이기로 했다. 우리들은 장행에 앞서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본부인 경고장에 들러 김구주석을 뵙고 우리 공작대의 뜻을 전달했다.
주훈제·장준하동지의 안내로 신현상판공실장을 통해 김구주석을 뵈었다.
김구주석께서는 우리와 함께 저녁상을 앞에 놓고 감격스런 목소리로 『여러분들의 결의가 눈물겹도록 고맙지만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부디 몸조심하기 바란다』고 격려의 말씀을 잊지 않았고 여비조 로 그때 돈 2백원을 손에 꼭 쥐어 주시기까지 했다.
자리를 같이 했던 엄항섭선전부장님도 반탁에 대한 표시는 가급적 북한대표들의 의사가 적힌 문서가 좋겠다고 말씀해 주었다.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197509300062
연대도 『맹휴「스트라이크」』 결의를 어기고 등교한 이동원 김득신 박세영 장정덕 안경득 방우형 등 우익학생들이 노천극장에 끌려나가 살벌한 인민재판을 받는 소동을 벌였지만 이들의 굽힐 줄 모르는 투쟁과 당시 대동신문기자로 있던 최중하 동지의 『「니콜라이」소련교육국장이 남로당에 국대안 반대를 지령했다』는 폭로기사를 써서 그 동안 멋모르고 동조했던 학생들도 자주성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하여 돌아섰다. 고 결과 맹휴파의 기는 꺾였다. 연대는 맹휴가 실패로 끝났다.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fs_014_0050_0020_0130

그러나 김구는 한민당 당수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적지 않습니다. 김구 본인은 비록 어떠한 처분도 받지 않았지만 암살범을 비롯하여 8인이 미군사법정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김구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이후 김 씨와 미군정당국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1948년 4월 20일 보고임)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06100050&ctcd=&cpage=1

최●면씨의 본명은 최중하(최중하). 연희전문 문과 학생이던 그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상해 임시정부 출신들이 만든 한독당 산하 대한학생연맹(약칭 대한학련)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리시영(이시영) 선생의 권유로 18세의 나이에 대동신문에 입사해 기자로 일한다. 당시 같이 일했던 사람 가운데 신아일보를 창간한 장기봉(장기봉)씨와 권오철(권오철) 전 동아일보 사회부장 등이 있다.

그는 김구의 개인 심부름을 주로 했다. 백범이 용재(용재) 백낙준(백낙준) 연희전문 학장에게 전하는 편지도 그의 손을 통했다. 최●면씨는 백범과 용재가 자신을 『학생이 아니라 마치 해방 전부터 독립운동을 한 동지처럼 대우했다』고 회고했다.

―백범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대한학련의 기본 입장은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해 정부를 유지한 분들이 정치를 해주셔야 올바른 건국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김구 선생을 지지하고 따랐어요. 학생운동은 위당 정인보(정인보) 선생이 학생의 본분을 지키면서 하라는 말씀도 있어서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다가 강의도 들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김구 선생을 뵐 기회가 많았고요』

―김구 선생과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한번은 김구 선생이 몸이 편찮으셔서 서울 용산 원효로 성심고녀(현 성심여고) 자리에 있는 성모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어요. 가톨릭 신자 전용의 조용한 병원인데 그곳으로 절 부르셔서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주셨어요』

최●면씨는 당시 김구 선생이 들려준 것이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했다.

<내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국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해방 전인 1943년경 미국에 있는 학자와 영국 사람들이 앞으로 전쟁이 끝나면 조선을 신탁통치하자는 사전논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카이로회담 직전, 중경에서 중국의 장개석(장개석) 총통이 날 불러 『카이로에 가면 조선 문제가 나온다. 그때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냐』고 물었다.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7&r_serial=03 (백의사 요원이었던 김두한 라디오 증언)


─ 여운형 씨를 살해하겠다는 것은 거기서 한 얘기가 아니고요?

▲ 그건 계통이 다르죠. 그것은 내가 보기에 밑에 사람들이……, 백의사가 대한임시정부 계통이에요. 염동진 씨가 대한임시정부 계통이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신익희 씨하고 전국의 대한임시정부 요원들이 늘 거기를 가요.

<위의 대담과 실제 라디오 증언들은 조금 어긋납니다.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계통이 다르죠. 그건 될수있으면 밑에 사람들이 내가 봤을때는 대한 임시정부에 대하여는 지시 명령을 받아가지고...

아마 백의사가 대한 임시정부 계통이에요. 저게 염동진씨가 저게 비록 대한 임시정부 계통이라고요, 저게 계통이... 계보가...

그렇기때문에 신익희씨하고 전국의 대한임시정부 요원들이 늘 거기를 가요. 여기서 저쪽으로 보고하고... 그러것는데...


계통인데... 대한임시정부 계통으로써의 내가 지금 다친 사람을 감안할때 암살당한 사람들 같으면 송진우,장덕수

상대방 : 그분들은 임시정부 계통이 아니라 한민당쪽이죠.

김두한 : 아니지. 대한 임시정부 계통에서 암살한거지.


플레이어를 클릭하여 런닝타임 7분쯤부터 들어보길 바랍니다. (7분과 10분사이에 나옵니다)


백범 김구의 안명근 사건 판결문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merit/search_merit_view.jsp?manage_no=3098&judge_case_item_cd=196200_SSG00005_3098&keyword=%EC%95%88%EB%AA%85%EA%B7%BC

그리고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merit/search_merit_view.jsp?
manage_no=553&judge_case_item_cd=197700_SSG00005_553&keyword=%EC%95%88%EB%AA%85%EA%B7%BC


강도인데 애국계몽운동을 했다는 안명근,최익형. 총알든 권총들고 뛰어다닌 안명근(안중근 친척이다)은 애국계몽운동으로 등록.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pdf_view.jsp?lm_sHisCode=PV_PG&lm_sBookCode=0001&lm_sItemCode=&lm_sSrchYear=&keyword=


판결문 사료메타 상세조회


판결년도는 1911년으로 맞추고, 1/2에 있다. (이미지 보기 기능이 있습니다)


 1911/07/22 안명근 등 18인 판결문 경성지방재판소


 1911/09/04 안명근 등 24인 판결문 경성공소원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jsp?lm_sHisCode=PV_DJ&lm_sBookCode=A011&lm_sItemCode=&lm_sSrchYear=&keyword=


독립운동사자료집 11 : 의열투쟁사자료집


재판기록


안명근(安明根) 33세 등 판결

황해도 신천군 두나일소면(斗羅一所面) 청계동(淸溪洞) 1통 4호
농업 해주읍 출생
강도 및 강도미수

안명근(安明根) 33세


(우리가 잘 아는 이름도 있습니다. 황해도 안악군장경면(長庚面) 비석동(碑石洞) 1통 2호 학교교사황해도강령군(康翎) 출생
강도미수 보안법 위반 김구(金龜) 36세)


 

결론 : 일제는 김구가 김창수였다는걸 몰랐습니다. 백범 김구은 자기 자서전에서는 안명근이 강도짓하자고 하니까 말렸답니다. 그런데 일제가 자기한테 안명근의 강도 혐의도 씌우려했답니다. 자기가 가담한건 슬쩍 빼놓았군요. 계몽운동은 아니고 당시 백범 김구 직업이 학교 교사였습니다.




판결
황해도 신천군 두나일소면(斗羅一所面) 청계동(淸溪洞) 1통 4호
농업 해주읍 출생
강도 및 강도미수
안명근(安明根) 33세
황해도 신천군 읍내면 사리(四里) 18통 9호
금전 대출업 황해도 신천군 읍내면 사리(四里) 18통 9호 출생
강도 배경진(裵敬鎭) 27세
황해도 봉산군 사리면 일리(一里)
학교 교사 황주군 출생
강도 이승길(李承吉) 25세
황해도 재령군 읍내면 소관동(小舘洞) 3통 4호
강도 및 강도미수 한순직(韓淳稷) 28세
황해도 안악군 문산면 오정동(五井洞) 통호 미상
안악군용문면(龍門面) 동읍리(東邑里) 출생
강도 최익형(崔益馨) 21세
황해도 안악군 장경면(長庚面) 비석동(碑石洞) 2통 2호
잡화상 평안남도 용강군 출생
강도미수 도인권(都寅權) 32세
황해도 안악군 청룡면(靑龍面) 귀장동(龜藏洞) 통호 미상
농업 황해도 재령군 출생
강도미수 김익연(金益淵) 29세
황해도 안악군 수석면(壽石面) 1리(一里) 통호 미상
잡화상 동소 출생
강도미수 장윤근(張倫根) 25세
황해도 안악군 세동면(細洞面) 소천동(小川洞) 통호 미상
잡화상 평양 외성 출생
강도미수 양성진(楊星鎭) 36세
황해도 안악군 세동면 서산리(西山里) 통호 미상
잡화행상 안악군 출생
강도미수 고봉수(高奉守) 27세
황해도 안악군 세동면 소서산동(小瑞山洞) 22통 4호
잡화상 황해도 안악군 세동면 소서산동(小瑞山洞) 22통 4호 출생
강도미수 박형병(朴亨秉) 26세
잡화상 황해도 안악군 세동면 소서산동(小瑞山洞) 10통 10호
곡물상잡화상 황해도 안악군 세동면 소서산동(小瑞山洞)10통 10호출생
강도미수 한정교(韓楨敎) 23세
황해도 안악군수석면(壽石面) 1리(一里) 1통 2호
곡물상 동읍군 출생
강도미수 김용제(金庸濟) 34세
황해도 안악군세동면(細洞面) 성내동(城內洞) 통호 미상
학교교사 안악읍 출생
강도미수 보안법 위반
김홍량(金鴻亮) 27세
황해도 안악군장경면(長庚面) 비석동(碑石洞) 1통 2호
학교교사황해도강령군(康翎) 출생
강도미수 보안법 위반
김구(金龜) 36세
경성 동부 연동(蓮洞)
경신학교 한문교사 충청남도 임천군(林川郡) 내동(內洞) 출생
보안법 위반 김도희(金道熙) 45세
황해도 신천군 동내면(同內面) 5리(五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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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사 안악군 순풍면 신풍동 출생
보안법 위반 고정화(高貞華) 28세
황해도 신천군 서분면 양정동(陽貞洞)
학교교사 동군 서부(西部) 양서동(良西洞) 출생
보안법 위반 유문형(柳文馨) 23세
황해도 송화군 상봉래면(上逢來面) 수교(水橋)
학교교사 동군 약면(藥面) 옥향동(玉香洞) 출생
보안법 위반 권태권(權泰善) 28세
평안북도 용천면 부남면(府南面) 덕암동(德岩洞) 4통 1호
용천군 서기 평안북도 용천면 부남면(府南面) 덕암동(德岩洞) 4통 1호 출생
보안법 위반 김용규(金容奎) 35세
평안북도 용천면 부남면(府南面) 덕암동(德岩洞)
농업 평안북도 용천면 부남면(府南面) 덕암동(德岩洞) 출생
보안법 위반 김용삼(金容參) 24세
평안북도 용천면 부남면 덕암동(德岩洞)
곡물상 평안북도 용천면 부남면 덕암동(德岩洞) 출생
보안법 위반 김성주(金成柱) 21세
황해도 재령군 좌리면 남정동 37통 7호
곡물상 황해도 재령군 좌리면 남정동 37통 7호 출생
보안법 위반 정달하(鄭達河) 39세
이상 각 피고에 대한 강도, 강도미수 및 보안법 위반 사건에 관한 명치 44년(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언도한 유죄판결에 불복하고 각 피고 모두 공소신립을 하였으므로 본 법원은 다시 다음과 같이 심판한다.
주문
피고 안명근·배경진·이승길·한순직·최익형·도인권·최명식·김익연·장윤근·양성진·고봉수·박형병·한정교·김용제의 각 공소는 이를 기각한다.
피고 김홍량·김구·김도희·고정화·유문형·권태선·김용규·김용삼·김성주·정달하에 관한 원판결을 취소한다.
피고 김홍량·김구를 각 징역 15년에, 피고 김도희·고정화를 각각 징역 2년에, 피고 김용구를 징역 1년 반에, 피고 유형문·권태선을 각각 징역 1년에, 피고 김용삼·김성주·정달하를 각각 징역 6개월에 처한다.
압수 물건 중 안명근 외의 17명 강도사건 제1호·제13호·제19호 탄환, 제12호·제18호 단총은 각각 몰수하고, 제11호 지폐 6백 35원, 제24호 내지 제32호 중의 지폐 5천 53원 및 제33호 수표 1통 외 물품은 범인이 소지한 장물이므로 추후 그 주인에게 돌려주기로 한다. 양기탁 외 17명의 보안법 위반 사건 압수품도 전부 소유자에게 환부한다.
이유
피고 안명근은 거상사사(居常死士)로 자임하면서 걸핏하면 과격한 행동을 취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작년 8월 29일 한국병합이 이루어지자 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나머지 당국과 위정자에게 반항하려는 뜻을 품고 먼저 이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키로 하였다.
그래서 부호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강탈할 것을 발의하고 그 범행에 필요한 단총 및 탄환(안명근 외 17명 강도사건 압수 제1호·제12호·제13호·제18호·제18호 증거물)을 준비한 다음 제1원심의 피고 박만준(朴晩俊)을 설득하여 이에 찬동케 하여 명치 43년(1910년) 11월 18~19일경 함께 황해도 송화면 하룡문(下龍門) 반정통(半亭洞)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동민 신경천(申敬天)을 그 집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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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언덕으로 유인하여 안명근은 권총을 겨누고, 전기 계획을 설명하면서 자금 수천원을 낼 것을 협박했다.
신경천은 겁에 질려서 그 다음날 돈 1천원, 그리고 23일경 돈 2천원을 신천군 읍내면 피고 박만준의 집으로 가지고 가서 건네줌으로써 피고 양인은 이를 탈취하였다.
제2, 피고 안명근은 전시와 같은 목적으로 동년 11월 21일 황해도 신천군 대정면(大井面) 발산동(鉢山洞) 민병찬 집에 침입하여 그의 조부 민영설(閔泳卨)에게 전시 단총을 들이대고 일금 2천원을 낼 것을 강요했다.
만약 이에 불응하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돈을 요구했는데 피고가 본안 사건에 의하여 체포된 관계로 현재까지 재물 입수는 아니되었다.
제3, 피고 안명근은 피고 이승길·배경진에게 자기의 뜻을 표명하여 그들로부터 찬동을 얻게 되자, 동년 11월 30일경 3명이 단총 2정을 장전하여 휴대하고, 동도 동군 읍내 3리(三里) 이원식(李源植)의 집을 급습하였다.
피고 안명근과 이승길은 각기 이원식에게 단총을 들이대고 수일내로 전계자금 1만원을 제공할 것을 협박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 뒤 이승길·배경진은 이원식에게 약속한 금액을 낼 것을 재촉하였으나, 쉽게 해결이 되지 않으므로 안명근은 계속하여 앞서 계획과 이원식에 대한 가해행위를 알고 있는 피고 최익형을 등지로 가담시켜 동년 12월 26일경 이원식 집으로 함께 가서 약속금 지연에 대한 추궁을 하고, 만약 속히 돈을 내놓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금품을 탈취할 기회를 노리던 중 피고 김홍량의 도움으로 이원식의 금전조달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안명근은 곧 계획한 대로 실행에 옮겨 최익형과 함께 그 목적과 행동을 알고 있는 피고 한순직을 설득시켰다.
다음해 명치 44년 1월 11일경 함께 이원식의 집을 습격하여 각기 단총을 들이대면서 3회에 걸쳐 동인을 위협하여 일금 6천 4원과 수표 4천원짜리 1매를 강탈하였다.
제4, 피고 김홍량은 명치 43년 12월 20일경 피고 안명근으로부터 전항과 같이 이원식을 협박하여 일금 1만원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알게 되었고, 동인에 대한 출금 독촉을 의뢰받자 이를 승낙하였다.
그 뒤 동 44년 1월 7·8일경 유재형(柳在馨)과 면접할 무렵 동인이 이원식의 부탁을 받고 안악 읍내에서 일금 5천 9백원을 조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을 기화로 동일경 마침 유댁사항 소식을 알리겠다는 핑계로 피고의 집을 내방한 안명근에 대하여 이상의 사실을 알리고, 곧 이원식으로부터 돈을 탈취할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동인 등이 전시 제3항 게재의 범죄를 방조하였다.
제5, 피고 안명근은 수명의 일당을 규합하여 주민들 중에서 재산가가 많이 거주하는 안악읍 내로 난입하여 재산을 탈취하려고 한순직과 모의한 후 동지 결합을 위해 동 43년 12월 19일 안악읍 내에 거주하는 원심 공동 피고 원행섭(元行燮)의 집을 찾아갔다.
여기서 동인 및 피고 양성진·박형병·고봉수·한정교와 만나 전기 계획을 말한즉 그 자리에 모였던 자들이 이에 찬성하므로 피고 등 일동은 즉시 행동을 거행하기 위해 읍내 재산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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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 및 재산의 정도, 헌병분견소의 위치, 재류 일본인의 인원수를 조사하기에 이르렀으며, 또 고봉수의 선도로 안명근·한순직은 재산가의 저택을 정찰하였다.
그 뒤 20일 안명근은 동소 양산학교(楊山學校)로 가서 피고 김구·김홍량·도인권·양성진·최명식·김익연·장윤근·김용제 등을 모아 전일과 같이 그가 기도하는 바를 그들에게 말하고, 신천군으로부터 동지 수십명이 총기를 휴대하고 내원하여 이에 동조케하여 줄 것을 역설하자 김구 이하 모두가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동일 밤에 일동이 교외 남산 습낙현(習樂峴)에 모여 시기를 보아 읍내로 난입할 것을 약속하고 피고들 중의 박형병을 파견하여 이날 밤 집합 전에 원행섭·한순직과 함께 동읍 헌병분견소 및 부근 일본인 가택을 미리 정찰케 하였다.
안명근 그날 밤 11시경 원행섭·양성진·박형병·고봉수·한정교·한순직을 동반하여 전기 단총을 휴대하고 습낙현으로 가서 김구·김홍량·도인권·최명식·김익연·장윤근·김용제 등도 약속대로 동소에 집합하였다. 그러나 신천군에서 동조하여 내회한 자가 겨우 몇 명에 불과하였으며, 그 자리에 동석했던 자 중에서 안악읍 내의 재산가들은 12월이 되어야만 많은 현금이 있을 것이라 하였으므로 동월 이후에 난입할 것으로 결정하였다.
피고인 일동은 다음 기도에 관한 숙의를 한 다음 일단 이날은 해산했던 것인데 그들의 괴수인 안명근이 체포된 관계로 해서 마침내 그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피고 김홍량·김구·김도희·고정화·유문형·권태선은 사립학교 교사에, 피고 김용규는 지방의원 겸 군 서기직에 있으면서 모두 그 향당에 다소의 성망이 있던 자이다.
원심 피고인 양기탁(梁起鐸)·임치정(林蚩正) 등과 함께, 일찍부터 일본이 구한국에 대하여 우월한 지위를 보존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상을 품게 되었다.
특히 양기탁·임치정은 경성방면에서 그런 주의자들의 두목으로 종종 그가 주재하는 대한 매일신보 지상에 매일 논리를 게재하여 민중을 선동하였다.
이렇게 줄곧 일본의 세력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특별한 효과를 보지 못하던 중 마침내 작년 8월 병합을 결행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이를 감개무량하게 여기고, 이는 당국의 장래가 마치 신부인 여인을 압박하여 점차 궁지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오해하였다.
이에 피고 두 사람은 북경·하얼빈·블라디보스톡 등지에 산재해 있던 이갑·안창호·김창만(金昌萬)·이종호(李鍾浩)·조성환(曺成煥) 외 수명과 서로 의견이 맞게 되어 조선 본토로부터 다수의 국민들을 청국 영토, 서간도 등지에 이주시켜 국가적 조직을 가진 대단체를 형성시켰다.
그리고 그들 청년 자제들에게 문무의 교육을 시켜서 기회를 보아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것을 기도하였다.
종래와 뜻은 같았으나 그 방법을 달리 한 피고들은 원심의 공동 피고와 함께 직접 양기탁·임치정으로부터 그 이론을 듣는 반면에 다른 피고들을 통하여 그 계획을 전하게 되었는데, 모두 이 단체적 이주를 발의 공모하여 다음해 1~2월에 이르기까지 동지를 모집하는 한편으로 선발자를 보내는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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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를 조달하는 등 착착 그 준비를 하여 본년 봄에 제1기 대이주를 실행키 위해 사업에 전력하였다.
특히 피고 김도희는 솔선하여 가담했는데, 동년 9월 및 10월 두 차례에 걸쳐 황해·평안 양도 유세의 길에 올라 선천 정거장에서 이승훈, 안악읍 양산학교에서 김구·김홍량, 신천·장연·송화 등의 각 군에서 유문형·고정화·안윤재 외 십수명에게 전기 계획을 알리는 한편 격렬한 말로 이들을 선동 권유함으로써 청중이 모두 그 말에 감동이 되어 1~2명 이상이 그 계획에 찬동은 하면서도 한 가구 한 명인 사정으로 인해 행동에 옮기지 못한 자가 있었다.
다수의 이주 동지자를 모집하고 귀경하여, 피고 고정화 및 유문형은 김도희의 의견에 동의한 뒤 동년 11월 하순 고정화는 경성에서 임치정 등과 그 실행 방법을 협의한 뒤 황해도 신천군의 모집 담당이 되어 오(吳) 모에게 이주를 권했으며, 또 양기탁의 명에 의하여 서간도 시찰을 나서려다가 그 뒤 피고 유문형에게 위탁하였다.
유문형은 황해도에서 동지 중의 수령인 김구의 지휘를 받아 고정화를 대신하여 신천군 모집 담당 임무에 종사하고, 피고 권태선은 그 거촌에서 동년 10월 송화군 모집 담당자 안윤재(安允在)로부터 권유를 받고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곧 감익룡(甘翊龍)·이종록(李鍾綠)·전용서(全溶瑞)·강문제(康文濟) 등을 설득하여 동지로 가담시키고, 이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출발하였다.
피고 김용규는 동년 11월 용천군 거제지에서 감익룡으로부터 양기탁 등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성하였으나 관직에 있는 몸으로써 즉시 이주를 하기 어려우므로 김용삼·김성주·김희록·고일청(高一淸)을 감익룡에게 소개하여 서로 수명을 설복하고, 마침내 동년 12년 김성주·김용삼·김희록으로 하여금 감익룡과 함께 청국 안동현으로 이주케 하였다.
피고 김성주·김용삼은 그들 외 2명과 협의한 끝에 청국 내왕의 요충인 안동현에 주거를 정하고, 조선 본토의 동지와 연락하여 이주 또는 북경무관학교 입학을 목적으로 그 지방을 지나치는 동지들 편의를 돌보아 주었다.
피고 김홍량은 황해도에 주거하는 부호로 역시 배일주의자 중의 중진 인물로 지목되는 자인데, 병합에 불만을 품고 충심으로 한국 국권 회복의 방책을 고려하고 있던 중 김도희로부터 양기탁·임치정 등으로부터 계획한 바를 듣고 그 취지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이주를 위해 안동현으로 가서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 동년 12월경 재산의 대부분을 매각하는 한편, 피고 정달하에게 교섭하여 동인을 가맹시킨 뒤 함께 이원식에게 소용되는 자금을 거출하기 위해 권유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피고 김구는 황해도 학도간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김도희가 그 도를 유세할 무렵 기도에 동의하여 박만준·안윤재 등을 김도희에게 소개하여 공모자로 가입시키고, 동년 12월 20일경 경성에 있는 양기탁 집에서 영수회합을 열게 되자 안태국(安泰國)·김도희·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 회합에서 조선 13도에 각자 1명씩의 주임을 두고, 다수의 민중을 모집하여 대거이주를 실행토록 결의하고, 주진수에게 강원도, 안태국에게 평안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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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임치정에게 경기도 외 기타 지방을 담당케 하고, 김구 자신은 황해도 주임이 되어 각지의 임무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앞에 밝힌 일 외에 동년 9월부터 금년 1월경까지 주진수로 하여금 서간도를 시찰케 하였으며, 전오규(田五奎)를 특파하여 그 지방에서 전답을 매입하고, 또 이동녕 및 주진수의 가족을 서간도로 선발 이주케 함으로써 공모자 일동이 그 뜻을 합해 각자 각 지방을 맡아 그들의 목적 수행을 도모케 하였다. 당시는 병합한 지가 얼마 되지 않고 아직 민심이 어수선한 때라 피고 등의 불온 언동으로 민심이 동요되어 치안 방해가 되는 점이 적지 않았다.
이상의 사실은 당심에서 각 피고의 공술 및 이원식·신효범(申孝範)·이응점(李應漸)·김성숙(金聖淑)·장응선(張應善)·장명선(張明善)·이용삼(李容三)·박언평(朴言平=별명 道東)·이상진(李相晋)·김병옥(金秉玉)·고경준(高敬俊)·이원형(李元亨)·허종(許鍾)·최형목(崔衡穆)·민영설(閔泳卨)·양기탁(梁起鐸)·임치정(林蚩正)·주진수·안태국·옥관빈(玉觀彬)·감익룡·이한해(李韓海=일명 泰周)·안윤재·이종록(李鍾綠)·강유(康洧)·김용서(金容瑞)·간승우(簡承禹)·이영규(李英珪)·신현도(申鉉導)·김용진(金庸震)·김귀영(金龜榮)·김희록(金熙綠)·고일청(高一淸)·김수철(金壽哲)·최시준(崔時俊)·이승준(李承駿)에 대한 사법경찰관의 각 취조서 및 검사의 신문조서 원행섭(元行燮)·백성진(白成鎭)·안선중(安善仲)·민장식(閔長植)·한상호(韓相鎬)·신규영(申奎永)·신상우(申相禹)·신의영(申義永)·이승조(李承祚)·이형재(李瑩在)·이진섭(李震燮)·송재식(宋在植)·이성원(李性源)·강하영(姜河永)·이윤각(李允珏)·김기창(金基昌)·이소근(李召根)·이종하(李鍾夏)·최중호(崔重鎬)·이학구(李學球)·이승훈(李昇薰)·유승렬(柳承烈)에 대한 사법경찰관의 각 취조서 검사의 신경천 신문조서, 이승길을 제외한 다른 피고에 대한 소행(素行)조서, 원심 공판 시말서에 징하여 이를 인정하는데 증빙이 충분하다.
법률에 비쳐볼 때 피고 안명근 제1의 소위, 피고 안명근·배경진·이승길·한순직·최익형 제3의 소위, 피고 김홍량 제4의 소위는 각 형법대전 제593조 제1호 기득재율에, 피고 안명근 제3의 소위는 동법 제593조 제1호 미득재율에, 피고 안명근·한순직·도인권·최명식·김익연·장윤근·양성진·고봉수·박형병·한정교·김용제·김홍량·김구 제5의 소위는 모두 동법 제593조 제3호의 제86조에 각각 해당하는데 제5의 소위에 대하여서는 동법 제137조를 적용하여 기수의 형으로 피고 안명근에게는 1등, 피고 한순직·김홍량·김구에게는 각 2등, 피고 도인권·최명식·김익연·장윤근·양성진·고봉수·박형병·한정교·김용제에게는 각 3등을 경감하고, 피고 등 강도의 소위 중 범정(犯情)을 원량(原諒)할 만한 것이 있으므로 동법 제125조에 준하여 피고 안명근 제1, 제3의 소위 및 피고 최명식·김익연·장윤근·고봉수·박형병(朴衡秉)·한정교·김용제 제5의 소위로 각 1등, 피고 배경진·이승길·한순직 제3의 소위, 피고 김홍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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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소위는 각 2등, 피고 최익형 제3의 소위는 4등을 감하고, 피고 김구·김홍량·김도희·고정화·유문형·권태선·김용규·김용삼·김성주·정달하 등의 치안방해 소위는 모두 보안법 제7조에 해당하므로 각기 징역형에 처한다.
피고 안명근·한순직·김홍량·김구는 각기 수죄가 구발(俱發)하였으므로 동법 제129조에 의하여 피고 안명근·한순직에 대해서는 상당한 각 죄 중에서 모두 제3의 죄에 좇고, 피고 김홍량에 대해서는 제4, 제5 죄는 상당하여 모두 보안법 위반 죄보다 무거우므로 그 하나의 죄인 제5에, 피고 김구에 대해서는 제5의 죄에 좇아 각기 처분키로 한다.
따라서 피고 안명근을 종신징역에 처하고, 피고 배경진·이승길·한순직·김홍량·김구를 각각 징역 15년에, 피고 도인권·양성진을 징역 10년에, 피고 최익형·최명식·김익연·장윤근·고봉수·박형병·한정교·김용제를 각각 징역 7년에, 피고 김도희·고정화를 각각 징역 2년에, 피고 김용규를 징역 1년 6개월에, 피고 유문형·권태선을 각각 징역 1년에, 피고 김용삼·김성주·정달하를 각각 징역 6월에 처하고 안명근 이하 김홍량·김구에 이르는 당심 피고 16명에 대한 강도죄에 관한 그 사건 압수 제1호, 제13호, 제19호, 실탄 제12호, 제18호, 단총은 범죄에 관한 응금물에 걸리므로 제118호에 의하여 관에 몰수하고, 동상 제1호 지폐 6백 35원 및 제24호 내지 32호 중의 지폐 5천 53원 제33호 물건은 범인이 보지한 장물이므로 동법 제164조, 제165조에 의하에 추후 그 주인에게 돌려주기로 한다.
이외는 모두 소유자에게 환부하고, 김홍량·김구·김도희·정달하에 이르는 담당 피고인 10명에 대한 보안법 위반죄에 관한 사건에 관한 압수물품은 모두 소유자에게 환부할 것을 언도한다.
그러므로 본 재판소가 피고 안명근·배경진·이승길·최익형·한순직·도인권·최명식·김익연·장윤근·양성진·고봉수·박형병·한정교·김용제에 대하여 이상의 동일한 근거에 의하여 동일한 처분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피고 김홍량·김구·김도희·고정화·유문형·권태선·김용규·김용삼·김성주·정달하에 대한 보안법 위반의 소위에 대해서도 사실 인정이 타당치 못하므로 이들 각 피고의 공소는 그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므로 민형소송 규칙 제33조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조선총독부 검사 사전항태랑(寺田恒太郞) 등 심택신일랑(深澤新一郞)이 본건에 간여한다.




5.16 이후 안두희의 운명


http://theme.archives.go.kr/next/cabinet/viewMain.do
국무회의 컬렉션.

5.16 이후

http://theme.archives.go.kr/next/pages/viewer/archiveViewer.jsp?archiveEventId=0028658630&themeFlag=N

1 김구선생 살해범 안두희체포에 관하여(제57회)  1961년 08월 09일 057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5300020920500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05-30&officeId=00020&pageNo=5&printNo=20818&publishType=00020

5월16일오후 육군본부에서 긴급소집된 혁명군소속 각군 지도부회의
1989.05.30 동아일보 5면 정치 사진

5월16일오후 육군본부에서 긴급소집된 혁명군소속 각군 지도부회의. 오른쪽 정면에 張都暎(장도영)육군참모총장,왼쪽으로 金信(김신)공군참모총장과 朴正熙(박정희)소장이 보인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051900329101003&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61-05-19&officeId=00032&pageNo=1&printNo=4714&publishType=00010

軍事革命委員(군사혁명위원)> 32名(명)의名單發表(명단발표)
1961.05.19 경향신문 1면 정치 기사(발표 명단)
〈軍事革命委員(군사혁명위원)〉 32名(명)의名單發表(명단발표) 【軍事革命委(군사혁명위) 十八日發表(십팔일발표)】十八日下午四時(십팔일하오사시) 軍事革命委員會(군사혁명위원회)는 同委員會委員名單(동위...

(김구의 아들,김신의 이름도 있다)

http://ehistory.korea.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395&mediadtl=2387&gbn=DH&quality=W
일반화질

http://ehistory.korea.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395&mediadtl=2387&gbn=DH&quality=H
고화질 (무언가를 깔아야한다)

3군 참모총장 선서식.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성호 해군참모총장, 김성은 해병대 사령관, 김신 공군참모총장의 선서식.
-국토통일을 위한 실력배양에 힘쓰겠다는 요지의 선서.

출처:대한뉴스 제 315호
 

http://ehistory.korea.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215&mediadtl=1544&gbn=DH&quality=W
일반화질


http://ehistory.korea.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215&mediadtl=1544&gbn=DH&quality=H

고화질

박의장 공군기지 시찰

박정희 의장 수원 공군기지 시찰.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수원 공군기지 시찰, 유양수 외교국방위원장 대동.
-김신 공군참모총장의 안내로 수원기지에 도착, 공군용사들을 사열.
-공군 장비를 시찰하고 젯트기에 탑승, 서울 상공까지 비행해서 수원기지로 돌아옴.
-공군용사들을 격려.

출처:대한뉴스 제 324호

http://ehistory.korea.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20033600&mediadtl=30010&gbn=DK&quality=H
군장성들 선서하는 모습, 회의 장면 등

무제(고화질)

-

출처:대한뉴스_KC 제 336호

http://ehistory.korea.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20033700&mediadtl=30021&gbn=DK&quality=H

최고회의 광경
-박정희 의장 참석한 국가 재건 위원회 최고회의

출처:대한뉴스_KC 제 337호


http://ehistory.korea.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20038400&mediadtl=30452&gbn=DK&quality=H

김현철 내각수반, 김신 장군에 임명장 수여
-임명장 수여식
-관계자들과 악수 및 환담

출처:대한뉴스_KC 제 384호

 

5.16 이후에 안두희가 체포된데에는 김구를 띄울려는 박정희 생각과 5.16 국가재건회의의 간부였던 김신의 입김도 컸을것이다. (추측)





전처 살해사건, 유족은 피의자의 동기 밝히지말아달라고 부탁

http://www.edaily.co.kr/news/read?newsId=04513286619375872

경찰에 따르면 유족들은 피의자의 구체적인 동기에 대해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의 생각

혹시 피의자가 피해자를 아무말 대잔치로 능욕할수있는걸까

아니면 뭔가 있는걸까



전처 살해 사건 의문점

https://dcnewsj.joins.com/article/23229315



이상하게도 죽은 전처의 딸의 증언만 매우 인용하고 있고

가해자의 증언만은 나오지 않는다



이게 좀 이상하다

저 딸은 가해자 신상은 공개했는데

국회에서 출석할때는 자신의 신상을 가리기위하여

우산까지 썼다.

왜 그런건지 궁금하다

그녀는 신상을 보이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걸까



태권더 박, 연재 재개



https://twitter.com/taekwondoer36/status/1075769107629264896


【お知らせ】「テコンダー朴」連載再開! 掲載誌は良心的人権派出版社コアマガジンが刊行する良心的人権派雑誌「実話BUNKAタブー」。同誌3月号(1月16日発売)から毎月掲載される。人権後進国の日本人どもよ、震えて待て!



알림 태권더 박 연재 재개, 게재지는 양심적 인권파 출판사 코어매거진이



간행하는 양심적인권파 잡지 실화 분카 터부 3월호(1월 16일)부터



매월 연재된다

태권더 박, 출판사와 저자의 불화로 연재종료

https://twitter.com/taekwondoer36/status/1075761199118086145


「ジャパニズム」(青林堂)で連載の「テコンダー朴」は、複数の諸般の事情により著者と青林堂との間の信頼関係が失われたため、青林堂で執筆を続けることが困難になったので、著者の意向で連載を終了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読者の皆様にはこれまでのご愛読を感謝いたします。(白正男、山戸大輔)


재패니즘(세이린도)에서 연재되되는 태권더 박은


여러가지 가정으로 저자와 출판사간의 신뢰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세이린도에서의 연재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작가가 연재를 끝내게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애독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백정남, 야마토 다이스케


PC(정치적 올바름)의 폐해


http://gall.dcinside.com/m/modernhistory/150996

모든 인종의 평등, 박애, 인권, 친환경, 성평등

딱 들었을때 굉장히 이상적으로 보이고 그럴싸한 말로 

사람들로 선동하는데, 

그들이 말하는대로 현실에 적용하면 결과는 파국임. 

진짜 악마랑 닮음.


라르고 윈치 홈페이지가 개설되다

http://www.groupwinch.com/

만화 라르고 윈치의 홈페이지가 이미 만들어졌다

한국에는 1~2권만 번역되었는데

유럽에서는 몹시 인기라고 한다

등장인물에는 누가 몇권에서 죽었는지도 나온다한다



성폭행 부부 자살 사건, 고법에서 다시 심판한다


https://dcnewsj.joins.com/article/23215880

댓글 하나

ㅇㅇ

미친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더러운 깡패놈에게 몹쓸 짓을 당하더라도 죽음이 증거를 대신해 판결을 바꾸는 안된다. 

억울하다면 자살이 아니라 범인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법은 반드시 입증된 증거를 바탕으로 해야한다. 

억울함을 죽음으로 증명하는 시대가 오게되면, 

그 목숨으로 억울한 자를 만드는 짓도 가능해져버리기 때문이다.

121.162.*.*


백범 김구, 아들이라고 페니실린을 줄수없다


김신 : 나의 형 김인은 폐병에 걸렸으나



아버지 백범 김구가 "내 동료들도 맞지 못하는 페니실린을 아들이라고 줄수없다"면서



페니실린을 안 줘서 죽었다



김인(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미국에서도 3월 15일에 페니실린이 민간판매되었는데

김인이 페니실린을 못 맞아서 3월 29일에 죽었구나(?)


https://en.wikipedia.org/wiki/Penicillin#Mass_production



제 2 차 세계 대전 후, 호주는 민간용으로이 약을 사용할 수있게 만든 최초의 국가였습니다. 미국에서는 페니실린이 1945 년 3 월 15 일에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45]


After World War II, Australia was the first country to make the drug available for civilian use. In the U.S., penicillin was made available to the general public on March 15, 1945.[45]



계모,이복동생에게 흉기 휘두른 여성

http://news1.kr/articles/?3505874

계모,이복동생에게 흉기 휘두른 여성




왜 그런걸까

궁금하다

돈? 원한? 뇌내 호르몬 이상분비?

물론 계모에 편견을 가져서는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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