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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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착한 사람의 엽기살인 공통점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apestry&logNo=221364173833&navType=tl


일본과 독일에서 발생하는 엽기 살인 사건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1. 죽을 때까지 죽어도 개미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 남자

2. 남을 죽이긴커녕 죽을 사람도 살릴 것 같은 남자 

3. 어느날 

4. 갑자기 

5. 아무 이유 없이 

6. 사람을 죽이는데

7. 극도로 잔인하게 죽이거나, 

8. 엄청나게 많이 죽이거나, 

9.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도록 죽임. 



지나치게 잘해준다, 지나치게 친절하다, 지나치게 착하다, 인간의 이 3가지 특징이 사실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 



범죄를 오래 연구한 사람들, 특히 남자의 심리를 오래 관찰한 사람들은 매우 익숙할 것입니다. 





나의 생각

내 생각에는 억눌린게 곯아터진게 아니라

흉악한 사람이 자신을 위장했는데

결국 흉악한 사건을 일으킨거 같다.

왜냐하면 주위사람들은 흉악범을 좋게 평가하지만

흉악범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서는 뭔짓을 했는지 모른다.





김하사는 왜 자살한걸까

욕설 논란 다른거 다 떠나서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pfjra_&logNo=221333498809&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갈 길이 멀다. 다만, 이번 취재로 딱 한 가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1950년대 미국의 진보 저널리스트 이지 스톤의 유명한 말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를 


조금 비틀었다. “어떤 전문가들은 거짓말을 한다.”


http://mediaday.co.kr/post/70442

배명진 교수는 김하사가 한 선임 간부에 질책을 당한 뒤 투신 자살 했다는 것이 군의 설명이었다. 17m 높이에서 투신했지만 시신은 외형적 상처가 적었다. 더 수상한 건 119 신고였다. 휴대전화도 아닌 공중전화를 사용했고, 다리에서도 많이 떨어진 곳에서 전화했다. 이에 김 하사 유족들은 신고자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119 신고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던 상황. 배명진 교수는 김하사 선임 음성과 119 신고자의 음성이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유가족에 전달됐고 유족들은 타살을 확신했다. 하지만 두 달 뒤 사건은 뜻밖의 반전을 맞았다. 진짜 119 신고자를 찾은 것. 당시 지명수배자였던 용의자는 휴대전화를 쓸 수 없어 공중전화를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사건은 자살로 종결 됐지만, 목소리 때문에 살인자 누명을 쓴 선임간부였다.










나의 생각



근데 김하사가 자살한건 간부의 질책과 관계있나요


설마

여러가지 9.23




누가 그러더군요. 유명해지면 똥만 싸도 좋아한다는거.. 요새 그분이 자기 인척을 죽인것도 찬양하는 미친놈도 있지요 ㅋㅋ 어떻게 보면 그분이나 남쪽 그분이나 딱 좋은게 있어요. "나의 정책 실패를 알고보면 친일파와 노론과 미국의 음모"로 몰수 있다는거.. 결국 발전이라는게 없지요. 그런 분 저기 있죠. 송지나라고...





나의 생각

김정은?







(부고) 100억의 사나이, 파랑새를 찾아서, 행복한 시간 작가 향년 65세





https://natalie.mu/comic/news/300800

쿠니모토 야스유키 작가가 향년 65세로 별세


고인은 행복한 시간, 100억의 사나이, 파랑새를 찾아서를 남겼다.

짤방은 쿠니모토 야스유키 작가가 생전에 본인에게 보내줬던 답장.


p.s 짤방을 고화질로 다시 바꿔서 올림




일본 홍차&과자점 카렐 차펙을 알아보자

생일날 아침을 차로 표현하다, BIRTHDAY (카렐 차펙)

https://www.karelcapek.co.jp/
카렐차펙
http://www.kodomo-abc.org/ehonmuseum2013/det-yamada.html
야마다 우타코
https://twitter.com/utakoyamada
트위터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야마다 우타코는 항상 귀엽고 아름답고 홍차와 과자를 먹고 있는 일러스트를 그려왔다. 

그리고 아예 홍차 가게를 차렸다.

그곳이 바로 카렐 차펙이라고 한다. 



일본 만화가 후쿠치 츠바사, 사쿠라이 아토 선생이 타카하시 루미코 여사 자택을 방문

일본 만화가 후쿠치 츠바사, 사쿠라이 아토 선생이 타카하시 루미코 여사 자택을 방문했다고 

작가들의 트위터가 보도 했다. 

후쿠치 츠바사, 사쿠라이 아토 선생은 타카하시 루미코 선생에게 일러스트도 그려줬다한다.


사쿠라이 아토, 후쿠치 츠바사 합작
https://twitter.com/fukuchi_tsubasa/status/1042643325914759169
후쿠치 츠바사 트위터 보도 (일러스트 첨부)
어제 담당 씨의 주선으로 사쿠라이 아토 씨와 함께 다카하시 루미코 선생님 댁에 다녀 왔습니다하여, 다른 ... 가장 높은였습니다! 다양한 만화의 이야기를 드린 것입니다 만, 계속 마음이 푹신 푹신하고있었습니다 걸. 지참 한 색종이 텐 짱 귀엽다라고 칭찬 해주고, 기쁠의 최상급이었습니다! ( '; Д;`)

https://twitter.com/sakurai_ato/status/1042685595993010176
사쿠라이 아토 트위터 보도 (일러스트 첨부)
다카하시 루미코 선생님 댁에 후쿠치 츠바사군과 다녀온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 속으로 좋아하는 선생님의 작업 환경과 서고를 견학하고 만화의 이야기를 들려 주거나 평생 무슨 경험을시켜주었습니다. 등신대의 라무(우루세이 야츠라 캐릭터)가 서습니다. "오늘의 켈베로스"재미 있다고 말해 줄 수있어 코피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

https://twitter.com/sakurai_ato/status/1042689919087333376
사쿠라이 아토가 그린 타카하시 루미코 캐릭터들 (일러스트 첨부)
이전 건네 색지를 다카하시 선생님이 작업 환경을 꾸며 주신 있었던 것도 기뻤습니다 ...😂

후쿠치 츠바사 

우에키의 법칙, 사이케 또 다시 작가

사쿠라이 아토

오늘의 케르베로스 작가

타카하시 루미코

란마 2분의 1 , 우루세이 야츠라, 이누야샤, 경계의 린네, 메종일각 작가

나의 생각 

후쿠치 츠바사 선생은 자신의 전 어시스턴트 사쿠라이 아토 선생과 함께 갔군요.

매우 사이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후쿠치 츠바사, 사쿠라이 아토의 어시스턴트였던 오우미 노코, 도세이 후지코 선생은 나중에 결혼했다합니다.






충격실화) 속옷도둑의 정체










간단요약

20대 여성이 신축맨션에 살고 있었다. 

속옷도둑이 자신의 속옷을 훔친다. 

탐정에게 의뢰한다.

탐정은 벽장에 몰래  잠복, 

정체는 맨션의 관리인이었다. 

의뢰인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이사갔다.

이사가는 이유는 맨션 주인에게 말했다.

저자 : 이사가는 이유를 맨션 주인에게 알렸기때문에 관리인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자연스럽게 상상할수있을것이다.

나의 생각

무섭다.

특히 관리인이 짤렸을까? 경고 받았을까?

궁금하다.







가장 인상깊은 구절


157~158 페이지 

경쟁업소를 파멸시키기위한 의뢰편

"그러나 탐정이라면 그 이전에 이미 깨달아야하면 하며, 그러한 의뢰는 절대로 접수해서는 안된다. 탐정회사는 정의를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출처


프로탐정의 테크닉(プロが明かす探偵&調査完全マニュアル) 

제164페이지

저자 : 일본탐정협회(日本探偵協会)

2000년 출간

한국판은 2004년 출간

한국판 링크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92968

원서 링크 

https://www.amazon.co.jp/dp/4537140240/ref=cm_sw_r_tw_dp_U_x_gA6OBb8S7ZBHC 

실존단체인 일반사단법인 일본탐정협회는 2008년 설립

https://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6%8E%A2%E5%81%B5%E6%A5%AD%E5%8D%94%E4%BC%9A

다만 児玉道尚은 실존인물임


4.19 유공자들은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6/04/19/2016041900103.html





이 전 의원은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관건선거'이자 전 국민이 실감한 '부정선거'였다"며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하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바다 위에서 떠오르면서 국민적 분노는 불길처럼 번져나갔다"고 말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마땅한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구호는 '이승만 퇴진'이나 '정권 타도'가 아닌,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고 이 전 의원은 회상했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이 강경해지면서 '부정선거를 다시하라'는 구호는 '독재정권 물러나라'로 바뀌기 시작했고,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이 시위 도중 자유당 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의 각 대학들이 19일 총귈기를 하게 된 것이라고 이 전 의원은 설명했다.



이 전 의원은 "이후 수많은 희생을 낳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결정하면서 '3.15 부정선거'로 촉발 된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퇴진'으로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중략)



4.19 당시 젊은 학생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는 알고 있지만, 그 분이 독립운동, 건국, 한국전쟁, 휴전, 한미방위동맹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이 무지의 공간을 파고든 것이 친북좌파들이며, 이승만 박사 때문에 적화통일이 안된 것을 몹시 애통해했던 친북공산주의자들이 나서 '반 이승만 모략책동'을 치밀하게 펼쳤습니다.



(중략)



이 전 의원은 "4.19 직후 국내 각지에 잠재돼 있던 '공산 분자'들이 제철을 만난 듯 몰려들었는데, 이들이 맨 먼저 들고 나온 주장은 '김구 선생 중심으로 통일됐어야 할 나라가, 이승만이 미국과 짜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분단 국가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논리였다"고 밝혔다.





당시 이 주장은 매우 그럴듯 했고, 제가 이 주장이 허구였음을 깨닫는데는 무려 반세기가 걸렸습니다.







(중략)



 이 전 의원은 "'부산정치파동'은 6.25전쟁 중에 미국이 미국의 종전정책에 맞서는 이승만을 끌어내리기 위한 공작을 이승만이 미리 알아채고 군대를 동원해 저지한 사건"이라고 밝힌 뒤 "'양민학살 문제'나 '한강 철도 폭파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결심사항이라기보다는 당시 서울이 3일만에 함락되고 공산당과 비(非)공산당이 섞여있는 혼란 속에서 군사 작전상의 필요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이 책임을 대통령에게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4.19 혁명 주체 행위자들의 민주화 인식

김재희

 (한국외대 박사과정)





4.19 혁명 주체 행위자들이 기억하는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의견이 나뉘어졌다. 



건국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빼앗아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도 있는가 하면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동정론 및 건국과 한국전쟁의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시대적 독재였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경식: 4월 12일 국무회의에서 내각 사무총장을 했던 신두영씨의 메모가 나왔어요. 

이승만대통령이 “내가 듣자 하니 마산에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시민들이시위를 벌였다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면 대통령인 내가 그만둬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합니다. 



26일 하야 전에는 병원으로 찾아가서 학생들을 방문했는데 학생들에게도 “내가 맞아야 할 총”을 학생들이 대신 맞았다고 했답니다. 





김덕일: 나도 그 얘기는 들었어요. 경무대에서 이승만대통령이 총소리를 듣고서 하야를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4.19가 일어난 건 3월 15일 부정선거와 자유당 정권의 부패 때문이지 이승만정권을 바꿀 의도는 없었어요. 

이기붕이 싫었다는 거지. 

지금 서대문에 있는 4.19 협회 자리가 옛날 이기붕씨 집이 있던 자리예요. 



성난 시민들이 이기붕씨 집 가구들과 색동이불을 꺼내 불 지르고 했어요. 

수박이 나왔는데 그걸 처음 본 사람도 있었어요. 

4.19 혁명 이후 경찰들이 다 도망가고 나니까 치안이 불안했어요. 



그 때 학생들이 나서서 거리청소도 하고 치안도 돌보고 그랬어요. 



4.19의 정신이 자유, 민주, 정의가 아닙니까? 정권을 바꿀 의도였다면 학생들보다정치인들이 주동이 되었을 거예요. 

그랬으면 학생들은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했겠지요. 



김교근: 동지가 얘기한 것 같이 학생들이 엉망인 사회질서를 잡았어요. 

청량리 경찰서 가서 교통정리도 하고 도둑도 잡기도 했습니다. 

기성세대들이 실리를 따지느라 주춤하는 사이 학생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일어난 것이고 혁명 이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위령제도 학생들이 주관해서 했어요. 

조의금도 익명 이외에는 받지도 않고 순수하게 위령제, 위령탑도 찬조금 받아 한 겁니다. 

4.19 혁명 이후 허정 과도정권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맞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국회가 해산했으니까. 

그래서 각 학교 대표들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연설을 들을 정도로 치안이 공백상태였던 거죠. 

데모를 안 해도 될 일을 하고 시민들도 데모에 염증을 느끼고 데모 만능시대가 되니까 그 틈을 노려 군부가 들어 온 거예요. 

국민들이 데모에 대해 부정적일 때 군사정권이 들고 일어나니까 국민들이 환영한 거지요.



(중략)



최갑필: 해방 혼돈시기 군대도 없고 경찰도, 전문성도 없던 말 그대로 혼동의 시기

였어요. 세계적으로도 못 살던 나라였고 북한보다도 못 살던 때니까. 독재같이 보

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여가던 시기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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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 적임자가 이승만대통령이었다고. 어떻게 보면 이승만대통령이 독재를 하고

싶어서 했던 것보다도 후계자가 없으니까, 사실 이기붕은 무능력했어요. 정권을 끌

고 나가다 보니 3선 개헌하고 독재가 되고... 5.16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분명

한 건 군사독재가 맞는데 큰 역사 속에서 보면 5.16은 바른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통로가 아니었나 싶어요. 4.19를 통해 민주주의로 진입한 것 같은데 좌파, 우파로

갈려져 정치가 혼란하던 시기였어요. 특히 이북과의 대치관계에 있던 상황이었기에

5.16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5.16을 통해 민주화도 가속화되고 산업화

로 우리나라가 옮겨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역사는 한 가지 정의로만 가지 않기

때문에 5.16의 나쁜 점도 많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http://library.419revolution.org/board/board/content.asp?tb=inno_33&page=14&num=1193



박의장 암살음모사건을 수사중인 중앙정보부는 정대근등 6명에 대한 증거보전 절차가

끝나는대로 금주안에 수사를 종결, 군재에 송치 할 예정이라고 22일 상오 박원석 중앙정보부 차장이 수사중간결과를 밝혔는데 동음모협의로 구속된자는 정대근(4월혁명단장), 이진면(사무처장), 정찬세(동부단장), 나동균(동발기인), 김긴태(4월혁명총연맹원), 박기용(신정당발기인)등 6명이며 피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4.19두돌기념식전에서 박의장, 이주일부의장을 살해, 정부를 전복시킬것을 음모, 식장에서 포상받을 김긴태가 단도를 갖고 들어갔으나 그좌석이 박의장이 직접수여하는 첫째줄이 아닌 제8열에 서게되자 앞으로 나가려고 경비원과 시비끝에 저지당하자 유리병으로 자신의 배를 찔러 국민들에게 자극을 주었으며, 그 뒤 자칭 신정당 발기인이며 동당청년부포섭책이라는 박기용과 접촉, 거가후에는 신정당으로 하여금 집권케하기로 내정 5.16기념식장에서 권총이나 수류탄을 써서 박의장, 이부의장을 살해한후 혁명위원회를 조직 신정당중심의 과도정부를 감시한다는 계획아래 경제인 박모사장외 일명에게 자금조달등도 의뢰하고 삐라 만매를 인쇄, 무기를 구하다가 검거되었다 한다.



특히 4.19기념식 전 거사계획에 대해서는 정산체, 나동균, 김긴태등 세 사람이 서로 살해역활을 맡겠다고 공을 다투었으나 정, 나는 가족이 있으므로 독신인 김이 해야겠다고 자청하였다는 것이다.



정보부는 이 가간을 국가변란음로 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중인데 특히 신정당 관계배후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별것이 없으나 계속조사해보겠다고 밝혔다.



(중략)



4.19포상대상자를 비롯한 4훨혁명동지회 소속회원등 5명은 18일하오5시 시내 정동에 있는 “밀크홀”에서 “군사정부의 포장을 받는니보다는 차라리 자유와 주권을 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장에서 손가락을 이빨로 물어뜯은후 혈서를 썼다.

혈서를 쓴 5명은 4.19포상대상자 나동균(28), 김긴태(24), 정찬세(28)씨등 3명과 박동철(26), 박영택(27)씨등 5명이다. 

혈서는 “3.16철회하라, 4.8성명은 국민을 기만한거다” “자유가 없으면 우리에게는 죽음과 무덤뿐이다” “4월의 피는 통곡한다”는등의 것이었다.

나씨등 5명이 손가락을 이빨로 물어뜯어 피를 흘리자“밀크홀”에 있던 손님들은 한사람 두사람씩 피해나갔으며 “홀”을 지키는 레지는 눈치만살피면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혈서를 쓴 홀은 테이블위에 피가 낭자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3592979&code=11131100&sid1=kim





80년대 들어서 지역 민주인사들이 이따금 추모 행사를 가졌지만 이마저도 정부기관에 의해 감시되는 실정이었다.



“80년대 후반이었어요. 묘역 재정비 사업비 모금을 위해 국회를 방문했는데, 의원들이 100만원, 200만원씩 내놓겠다고 서명을 했어요. 그러나 이후 약속을 지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http://www.jlmaeil.com/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194&idx=91588



4·19혁명의 세계화 논의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68967



그러나 혁명과 정의의 열기는 잠시 뿐.



1년 뒤 발생한 5.16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사흘이 멀게 자택에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이 들이닥치는등 고인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해야 했다.




선거등 사회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외국으로 추방당하다시피 한 고인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도저히 할 수 없어 결국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나의 생각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에 위험이 될만한 사람은 감시, 탄압했다.

서중석이 말하는 장면 시대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982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했던 이들 중에도 1950년대, 1960년대에 참 어렵게 생활한 사람이 많다.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이 당시 얼마나 불안하고 힘든 생활을 했나. 감시도 받았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감옥소에도 여러 번 갔다. 정말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던 때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 세력이 7.29선거 같은 데서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하는 기대를 일각에서 6월까지만 해도 했는데, 6월 중순 넘으면서부터는 '진보 세력은 별로 힘을 못 쓸 거다', 이게 일반적이었다. (이승만 하야 후) 4월혁명을 구체화하는 데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딸려 







(중략)





이승만 대신 장면 정권 집중 비난한 5.16쿠데타 세력



(중략)

4월혁명 시기, 혼란기로만 볼 수는 없다



 



프레시안 : 혼란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때 시위가 많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중석 : 주된 혼란 하면 시위를 연상한다. (일각에서) '데모 만능 시대다'라고 하는데, 그럼 데모가 언제 제일 많이 일어났느냐. 시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건 1960년 4월 27일부터 그해 6월말까지다. (이듬해) 5.16까지 일어난 시위의 대부분이 이때 일어난다. (집계에 따라) 60퍼센트 이상(으로 본 데도 있고), 어떤 데는 80퍼센트라고도 본다. 상인들도 일어나고, 경찰도 시위했다고 한다. 억눌린 사람뿐만 아니라 뭔가 불만 있는 사람, 당한 사람은 다 시위 한 번씩 하려고 했던 거다.





(중략)





프레시안 : 장면 정권은 과거사 정리 작업 전반에 대해선 미온적이었지만, 경찰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치안력이 약화돼 혼란을 자초했다는 식으로 장면 정권을 겨냥하기도 한다.



 



서중석 : 장면 정부가 경찰에 대해선 강하게 숙청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았나. 왜냐하면 (경찰은)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도구 아니었나. 3.15 부정 선거를 비롯한 각종 부정 선거에서 제일 도구 노릇을 하지 않았나. 특히 사찰 경찰이 심했다. 그러니까 숙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경찰력이 약화됐기 때문에도 1960년에 시위가 좀 많았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1961년 3월 시위와 4월 시위, 그러니까 2대 악법 반대 투쟁에 관한 당시 기사들을 보면, '경찰의 시위 대처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고 보도하고 그랬다. 장면 정권이 새로운 경찰을 기용하면서 시위 대처 능력도 차츰 나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의 생각

그렇게 안정적이었으면 어떻게 5.16이 일어났나

디시인사이드 마이로그 없어져

디시인사이드가 개편하여 마이로그 기능이 없어졌다. 

이를 미리 공지하지않고 개편하여 (9월 17일)

혼란과 불만이 예상된다

언제부터 여자의 진술로 유죄나고 징역났을까

https://dcnewsj.joins.com/article/22968980


재판부는 “피해자가 주요 부분에 관해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진술을 하고 있고 진술내용 자체에서 불합리하거나 모순된 부분이 없다”며 “피해자가 연기자로서의 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를 감내하면서까지 조덕제를 허위로 무고할 이유도 없다”고 밝혔다. 
  
조덕제는 2015년 4월 영화 촬영 중 성폭행하는 내용에서 사전에 합의하지 않은 채 상대 여배우 A씨의 속옷을 찢고 바지에 손을 넣어 신체 부위를 만지는 등 강제 추행한 혐의로 같은 해 12월 재판에 넘겨졌다. 또 허위 내용의 고소장을 작성하고 피해자를 고소해 무고한 혐의도 받았다.  
  
1심은 “피해자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수위가 높은 폭력과 성폭행 연기에 대해 감독과 조덕제가 충분히 사과하지 않자 억울한 마음을 다소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은 피해자인 여성 배우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해 유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사건 직후 촬영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요구하자 조덕제가 잘못을 적극적으로 부인하지 않은 점, 이 일로 조덕제가 영화에서 중도 하차한 점 등이 판단 근거가 됐다.   
  
대법원은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조덕제는 또 A씨로부터 추가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1일 검찰에 따르면 A씨는 명예훼손‧모욕‧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조덕제에 대한 고소장을 지난달 중순쯤 서울남부지검에 제출했다. A씨는 또 인터넷을 통해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글을 지속해서 올린 네티즌 총 73명을 같은 혐의로 고소했다.   
  
A씨는 고소장에서 조덕제가 인터넷 카페 등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자신에 대한 악성 댓글을 달도록 선동해 심각한 2차 피해를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보배드림 성추행 6개월 판결도 그렇고

여자의 진술로 유죄, 징역나온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에도 비슷한 판결이 있었다.








가해자는 혐의 부인,

증거없음

목격자 없음

그런데도 징역형이 나왔다





















무섭군요

적반하장 갑...


전략) 1937년 1회 신문전에 출품된 이 그림(아사이 간우에몽의 통주의 구원)은 중국 통주에서 벌어진 중국군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그림속에는 어린아이를 안고 의자에 앉아있는 여성을 중심으로 부상당한 일본군 병사. 그리고 중국군병사들과 도망가는 젊은 여성들이 화면 가득 그려져 있다.(하략)

- 김용철 중일전쟁기 일본의 전쟁화-

(전략) 한편 (일본의 전쟁화에서 묘사된) 중국인 성인남성의 모습은 일본이나 일본에 우호적인 젊은 여성이나 노인. 어린이와 대조를 보인다. 점령지와 국민당 통치지역 경계에서 활동하는 수상한 쿠리로 묘사된 경우 다양한 자세로 서있거나 앉아있는 모습의 다양성에 비하면 표정과 차림새에 개성이 없고 무감각한 집단이나 부상당한 포로로 묘사되어 있다. 국민당군을 묘사한 경우에는 패퇴하는 국민당 군대가 민간인 여성을 납치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예에서 보듯이 국민당군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 같은책 34-







근데 사실인가요? 아닌가요?

태권더박 작가, 대만 소녀상 사건 논평.jpg














https://twitter.com/taekwondoer36/status/1039819235285856256



태권더 박 작가,



일본의 보수 운동가 : 위안부 동상을 발로 차서 위안부와 대만인을 모욕



한국의 태권더 박 독자 : 태권더 박을 위안부 동상에 바치고 한일우호를 기원



왜 이런 차이가 벌어졌을까



도덕적 우열, 민도의 차이.



일본은 위안부 분들과 대만,한국에 사죄해라.



인권격투기 만화 태권더 박 발매중














라고 트위터로 보도했다.

나라와 싸운 백성 : 카와사키 이소노부 편



지금은 폐간된 비즈니스 점프






"나는 백성이다. 백성이라고 하여 백성을 우습게아는 공무원(役人)과 싸운다."

불법 쌀장 가와사키 이소노부

식량청과 싸워서 이긴 반골의 사나이이다.








아버지는 공무원들의 음모로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했다.
'






 지금의 아내가 될 사람도 만난다. 








쌀장사를 탄압하는 식량청과 맞서는 주인공, 행동개시



식량청



주인공 : 나를 고발해라~!!!!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카와사키 이소노부, 지금은 주세법위반으로 국세청과 싸운다!



그때는 2004년이고 지금의 근황을 알아보자

카와사키 이소노부 : 모름

이 만화의 작화가 二宮亮三 선생 : 상업지 그리고 있다. FANZA(구 DMM)에 검색하면 나옴




















술취해서 쓰러진 사람은 절대 건드리면 안된다는 뉴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apestry&logNo=221355425274&navType=tl





술에 취한 사람은 챙기지 마시고 그냥 집에 가세요. 

정 위험할 거 같으면 경찰이나 119를 부르세요. 

그게 단연코 서로에게 더 안전합니다. 








나의 생각

바로 그거다

남성작가보다 여성작가가 답장을 더 잘준다.jpg


1장



남성 20통

여성 20통



2장



남성 15통

여성 20통



3장



여성 20통



4장



여성 4통















내가 받은 답장을 분석해보니 그렇게 나옴









볼프64 : 문재인이 가장 미국에 우호적인 대통령이다


이슬람 극단주의가 싫다는 분들에게 드리는 가장 효과적인 제안


https://blog.naver.com/volf64/221354630371



말로만 이슬람 극단주의가 싫다 해봐야 변하는 건 없다. 

이슬람 극단주의의 심장부인 사우디가 망해야 이슬람 극단주의도 한풀 꺾인다.

마음에 안드는 악덕기업을 망하게 하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 기업의 물건을 안 사주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게 효과 만점이다.

우리도 이슬람 극단주의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산 석유를 사지 않으면 된다. 

한국 에너지 발전의 100%를 야만스러운 이슬람 극단주의를 후원하는 중동산 석유가 아닌 미국산 석유로 채우자. 

미국은 우리들의 동맹국이고 트럼프는 마침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판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앞으로 모든 에너지 발전에 필요한 자원을 미국산만 사다 쓰겠다고 하면 트럼프는 두 손 번쩍 들고 환영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인에게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겼다면서. 

첫째로 우리가 피땀 흘려 번 돈이 중동의 사악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자금으로 흘러가지 않아서 좋고, 둘째로 한미동맹이 더욱 굳건해진다. 

지금 남북대화와 종전 선언에 있어서 미국의 의지가 아주 중요할 때인데 우리가 이렇게 점수 따주면 트럼프도 더 우리 말 잘 들어줄게 아닌가? 

꿩먹고 알먹는것도 모자라 둥지 뜯어 불까지 필수 있는 좋은 일이다.

청와대에 이상한 헛소리 하지 말고, 

중동산 석유를 쓰지 말자고 청원 넣어라. 

100% 미국산 텍사스 중질유와 셰일가스로 떼우자.

별거 아닌거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아, 마침 우리나라 정부도 그렇게 하고 있네.

애국은 지갑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이승만 동상 세우자고 지껄였던 한 수꼴 단체에서 나왔던 말이다. 

그 말이 맞다. 

친미親美는 외교 구호 몇마디가 아니다. 

친미는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8/2018012801402.html

원유 수입, 중동산 줄고 미국산은 늘었다

역시 문재인이다. 

아마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중에 가장 친미성향이 강한 대통령 아닐까?
















나의 생각

대북제재 시기에 북한 석탄 밀반입은 무엇인가


볼프64는 황당하게도 불리한 사실은 일부러 짜르고 주장한다. 














청산리 전투 과장 설?

역사비평 이번호 단상- 세개의 기사


청산리 대첩 과장설 제기

해당 논문을 보니 코미디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게 기억나요. 우리 할아버지는 3.1운동때 다락방에 들어가 이불 세겹을 둘러싸고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싶어도" 일본놈이 무서워서 구석에서 불렀다는게 포인트입니다(뭐 친일파보다는 낫겠지만 ㅋㅋ)

이 논문이 딱 "이불쓰고 독립만세"부르는 셈이에요. 이전 연재들과 달리 신통할 정도로 구석구석까지 "않습니다" 아니 결론만 보면 "이범석부터 우리 교과서는 대놓고 거짓말 가르쳐요 뿌우..."인데 그냥 지나가는 수준의 언급과 "전쟁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벌어진 기록의 차이"로 퉁칩니다.(그럼 저기 북한이나 구 일본제국의 방송은요? 북한이야 그렇지만 일본공간사도 지금은 "전후 자료 교차편집으로 과장된 기록을 수정했지" 대놓고 가르치지는 않거든요) 

뭐 옛날처럼 엄한 이야기했다고 보안사에서 사람잡아가서 때리는 시절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일본관계는 엄한 이야기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기 좋으니 은근슬쩍 넘어간 케이스이지요 ㅋㅋ

그리고 하나더

이웃분도 집필에 참여하셨지만 유사역사학(특히 고대사부분)에 대한 비판이 역비에서 프로젝트로 진행되는데.. 이번호에서는 "사이비 역사학"으로 낙인찍는 것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실렸습니다. 뭐 그렇다고 "우리 환국 OK"는 아니고 사이비 역사학으로 이데올로기화 해서 상대방을 낙인찍는 것이 자칫하면 고대사연구(당연히 사료 부족으로 여러 의견이 있을수 있는)에 나올수 있는 소수의견을 짓밟을수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고개가 갸우뚱하는 논지입니다. "문재인의 최저임금제는 잘못되었다" "부동산 정책을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건 정책 당위의 문제이지 사실의 문제(통계조작이 아닌한)는 "아닙니다" "문재인 비판하면 적폐"나 "박정희비판하면 빨갱이"라는건 문사철의 희안한 논리이지 그게 사실과 다른 문제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유사역사학의 문제는 음.. 예를 들면 "문재인은 사실 지구인이 아니라 M78성운에서 온 문어발 외계인으로 한국인을 주식으로 삼는 괴수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이야기에요(..) 즉 "사실과 전혀 무관하고 증거도 없는 스토리"라는겁니다. 비판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웃분이나 다른 분들이 그런류의 이야기를 "사이비" 역사학으로 강하게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그 의견에 대한 비난입니다.

아마 다음에 또 다른 재반론이 있을법하지만.. 역비가 슬슬 갈아타려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들지요 ㅋㅋ

참고로 그 저자는 "사회학자"(...) 

덧: 신화깨기 연재 시리즈는 1편이 거북선 잠수함설(,..) 2편이 김정호 실측+ 옥사설입니다. 즉 이 두가지 설은 대놓고 비판하여도 상관없지만 청산리 전투 사망자 과장설을 대놓고 이야기하기는 껄끄럽지요 ㅋㅋ 

개인적으로는 음.. 몇달전부터 진행된 "여말선초의 사상적 계승" 시리즈가 아주 맘에 들어요. 모 드라마처럼 절대거악 고려도 아니고 비록 새로운 사회구조를 채택한 조선이지만 고려말의 여러 유산을 독자적으로 승계 발전시켰다는 이야기.. 



























나무위키 청산리 대첩 항목


3.2. 한국측의 주장[편집]
그러나 일본 측 주장 역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 근거로 일본군이 자신들의 패배를 축소, 은폐한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4] 일본군의 일방적인 패배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나, 적어도 일본군 입장에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결과를 사실대로 서술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상존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바로 일본 측 기록인 간도출병사에서도 나타난다.

첫번째, 간도출병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500~600명 규모의, 기관총을 보유한 무장 조직을 상대로 1개 기병연대는 퇴로 차단을, 1개 보병연대는 추격을 맡아 확실한 병력의 우세를 점한 상태였고, 실제로 600명 규모의 숙영지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첩보가 사실이라는 것까지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후 실제로 추격에 나선 것은 1개 보병중대[5] 규모였고, 이들은 약간 떨어진 정도도 아니라 무려 30분 이상 단독으로 교전한 이후에야 연대 주력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본대와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600명 규모의 무장조직을 상대로 4:1 이하의 열세에 처한 상태로 교전을 벌였는데, 그럼에도 이들은 오히려 1대4의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이며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개 중대가 고립된 상태에서 지리적으로도 열세에 놓이고, 수적으로는 4배 이상 많은 적에게 공격을 받아 핀치에 몰려 있었으나 용전분투하여 오히려 4대1의 유리한 교환비로 교전을 종료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정규군과 게릴라의 질적 차이를 감안해도 과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론으로 제기한 예시들은 모두 정규군이 기습의 묘를 살려 들이치거나 높은 훈련도나 병종의 이점을 살려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었던 조건이 있는데, 거꾸로 정규군 쪽인 일본군이 기습당하고, 병종의 이점도 없었으며, 높은 훈련도를 살려 빠르게 기동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예시로 든 전투들과 같은 전쟁인 왜란과 호란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에서 비정규군 쪽인 의병들이 숫적/지리적/전술적으로 모두 우세한 상황에서도 항상 모랄빵을 터트리며 달아나기 바빴는가?

두번째, 그리고 일본이 간도 참변에서 유달리 잔학한 토벌 작전을 펼친 것 또한 패배의 간접적인 증거로 작용할 수 있다. 일본이 의병을 잡기 위해 애꿎은 민간인까지 희생시킨 것이야 남한 대토벌 작전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 때는 '의병을 잡겠다'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민간인들의 희생을 신경쓰지 않은 것에 가까우며 실제로 수많은 의병들이 쓰러지면서 적어도 호남지역에서의 항일 운동은 그 기반부터 흔들리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간도 참변에서는 이미 독립군들이 중국군과의 사전 교섭을 통해 안전지대로 피난한 이후였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고,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수사가 아니라 화풀이성으로 잔학한 학살만 일삼았다.

세번째, 일본 측은 야스쿠니 신사에 기록된 인원과 후생성 자료,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드나, 애초에 앞의 두 자료는 2차 사료에 가깝다.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를 바탕으로 전몰자를 봉안한 것이 야스쿠니 신사고, 같은 보고서를 채택하여 연금 수혜자를 결정한 것이 후생성의 자료이다. 서로를 참고한 자료들이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신빙성이 늘어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가 모든 전몰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후에도 살아있던 사람이 야스쿠니 신사의 명부에 올라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 [6] 야스쿠니 신사가 자체적인 조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럼 대체 무엇을 근거로 집계했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류가 있는 것인가?


청산리 전투의 전사자에 관한 한국 측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현대로 올수록 한국 측 자료의 추정치 역시 납득 가능한 선에서 모이고 있고, 둘째, 이 정도의 인명피해라면 재편성을 위한 인사명령까지는 갈 필요가 없으며, 셋째, 일본 측 사료를 전적으로 따른다 하더라도 세부적인 기록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넷째, 일본군의 다른 대 게릴라 작전과 비교했을 때도 간도 참변은 그 정도가 지나쳤으며, 다섯째, 후생성 자료와 야스쿠니 신사, 제19사단 사령부 보고서는 서로를 바탕으로 작정된 것이므로 상호 간의 일치가 주된 근거로 작용할 수 없고, 여섯째, 야스쿠니 신사의 전몰자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근거하면 이기진 못했지만 최소한 일본측이 주장하는 손실비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또, 설사 일본측 기록이 전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당초 독립군을 섬멸하겠다는 일본측의 작전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했으므로 일본의 승리라고 볼 수 없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의 도표에서도 전술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서술하고 있고 그 정도 평가가 적당하다.


2.5. 한일 인터넷상에서의 논쟁과 시선[편집]
당시 기사화된 한일 네티즌간의 항쟁 '#'

과거 인조이재팬시절, 인조이재팬을 배틀 아레나로 둔갑시킨 분기점이 청산리 전투에 관한 논란이다.

당시 일본의 네이버 총독부를 위시한 네티즌들은 일본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를 근거로 한국측이 주장하는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결과는 반대였다고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에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한 총포를 노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측 주장대로 네 자리수 인원이 전사했는데도 모든 전사자를 안치하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다.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당시 일본군 연대장 가노가 이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3000여 명이나 전사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 연대들이 증원도 받지 않고 추격을 지속했다.

3000여 명이 사망한 특기할 만한 결과인데도 어느 곳에도 기록이 없다.

한국 측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도 나온다.

독립군이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으며 일본군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거기에 편승해 기존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반감을 품고 있던 한국인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로 청산리 전투 대승이 사실이 아니며 독립전쟁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당시 독립운동가 등이 윤색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립군의 전과가 신문이나 사료마다 중구난방이다.

청산리 전투 관련 연구 사료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계속해서 감소하였다.

청산리 전투 패잔병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일본군의 복식이 1930년대 이후 것으로 해당 사진은 청산리 전투의 사진이 아니라 후대에 찍힌 것이다.


3명밖에 죽지 않았는데 군사 2만5000을 간도로 끌고와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청산리 전투와 간도참변의 인과관계 자체가 불명확하다는 반박을 받았다. 기존 역사 교과서나 민족주의 사관에서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보복으로 일본군이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지만, 간도 참변이 시작된 날짜는 청산리 전투(10월21일 시작)의 이전인 10월 9일부터 약 27일간 지속되었으므로 모순이 발생한다. 또한 일본군이 적게 죽었으니 토벌군을 적게 투입하고, 많이 죽으면 많이 투입한다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도 의문이다. 테러범 몇을 수색하고 잡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인원이 동원되거나 유해 조수를 잡기 위해 전국적 규모의 구제 사업을 하는 등 투입 자원은 당국의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피해자 수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당시(2004~2005년 경)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의 네임드 유저였던 '고람거사'가 기존 사관으로 일본인과 맞섰다가 패퇴했으며, 같은 시기 서울대학교 교수 이태진이 인조이재팬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넷우익한테 대패하면서 인조이재팬의 한국인과 한국사 사이트의 분위기는 초토화되었다. 네이버 총독부의 활동이 더 활발해짐은 물론이요 국내의 일빠와 국까도 이에 물타기에 돌입했으나 '고람거사'는 기존의 네이버 총독부에서 자료로 들었던 일본 후생성의 문서가 날조된 자료라는 사실을 파악했다면서 이 점을 들어 반격에 나섰다. 네이버 총독부에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말 돌리기에 들어가 싸움은 한국 측 승리로 간주될 뻔했으나 익일 일본 측에서 후생성에 직접 전화해 문서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고람거사는 일본 측이 논거로 드는 후생성 사망자 명단보다 실제 사망자가 많다는 일본 측 자료를 보고 반격에 나선 것인데 실상은 고람거사가 '사상자'를 '사망자'로 혼동한 탓에 나온 오해였다. 이 부분은 당시 활동하던 역사 사이트 회원 일부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인터넷 상에는 이전 패배 만큼 주지하지 않았으나 해프닝에 가까운 이유로 어이없게 패배한 사례라서 역사 사이트에서 인조이재팬을 언급하면 이것을 금기로 다루거나 분노들에 휩싸이곤 했다. 

논쟁이 발생한 지 10년도 더 넘었지만 한국 역사학계는 일본인들이 제시한 대외비를 비롯한 실제 자료들과 지표에 대해 반박을 내놓지 못한 채 박은식의 주장이나 신문기사만을 여전히 인용하고 있다(대표적으로 신용하 서울대학교 교수). 그리고 이 사건은 2010년대 이후로 인터넷 일각에서 몇몇 사람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형 자국 혐오자로 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등 이 논쟁의 나비효과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논쟁의 전말과 논쟁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 솔직하게 공유되고 합리적으로 탐구되지 않는 한, 기존의 사관만을 가지고 일본 측 주장을 접했을 때 정반대로 주화입마하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날 것으로 우려된다.

한편 이 싸움은 한국사 포럼 및 사이트에 단순한 회의감이 아닌 쇄신의 필요성을 환기하기도 했다. 이때 논쟁을 보면 한국측엔 학술 논쟁을 하면서 논문을 인용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국내에는 민족주의 사관으로 쓰여진 교과서를 베이스로 한 막연한 사관밖에 없었다는 점, 엄격한 사료 비판을 이용한 논쟁을 한 경험도 없었기에, 사료를 기반으로 매사 명명백백히 검증해서 타국의 상대방을 납득시켜야 하는 토론에서는 연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또한 10대에서 20대가 절대 비중을 차지하던 이용자와 달리 일본 측은 30대에서 50대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참여했다는 점도 반성할 점으로 꼽혀 고연령층에서도 인터넷을 활용한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비판이 대두됐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역사 갤러리가 붕괴하고 이후 역사 사이트는 분화하고 군소화하면서, 이런 논쟁의 장은 좁혀졌으면 좁혀졌지 넓어지지는 않아서 쇄신 분위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로 제대로 된 토론을 위해선 논문과 1차 사료들을 베이스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게 성과라면 성과. 우리나라 역사를 탐구할 때 독립운동 당시 사기 진작을 위한 일종의 선전과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민족사관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고, 또한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주장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억지로 키우기보다는 사실에 근거한 서술을 하되 열세의 전력과 상황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한 독립군의 의의를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7] 

물론 그것과 별개로 전투 결과가 일본측 기록과 같다고 해도, 전투에서 소기의 전술적 목적을 이룬 쪽은 독립군 측에 가깝다. 일본군의 목적과는 다르게 독립군은 조직을 온존하여 이동하는데 성공하였고 포로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추격전의 목적 달성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봐도 된다.[8] 일본군 전사자가 적다고 해도 저 전투 결과는 상부에서 문책을 하면 했지 칭찬을 받을 결과가 절대 아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봉오동이나 청산리 전투 이후에 일본군의 간도 학살이 더 심해진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전사자 수를 떠나 이 결과가 일본군 입장에선 매우 약이 오를 결과였다는 것.... 교과서는 헛소리를 하니 문제지 2017년 기준으로 교과서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전과는 언급하지 않고 청산리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의 토론 주제는 '일본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청산리 대첩이 대첩이냐 아니냐'가 주제였기에 논쟁에서 주장을 관철당하고 이렇게 '최소한의 의의'를 찾는것으로 만족해야 할 만큼 기존 사관에서 후퇴한 건 사실이라는 점이다.







나무위키

일본군도 뻥을 친 적 있으며

야스쿠니가 정확한 조사를 했다는 증거도 없다

비록 한국 독립군이 거짓말했어도 일본에 맞선 의의를 높게 사서

옹호해야한다.

나의 생각

그럼 일본의 청산리 전투 기록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일제와 맞선게 왜 훌륭하고 찬양되어야하나





해방후 단정반대 분단반대, 백범의 남북협상 지지

여러가지 9.6


1. 특사

간단하요. 날 받아오기(...) 솔직히 기대도 안했고 "지금 당면한 문제는 평양가서 풀어야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뭐 어떤 미친놈은 추석에 큰거 터뜨리려고 지금 쉬쉬한다는데.. 사실 그러기는 좀 애매하고

누가 그러더군요. 바둑에서 묘수를 세번쓰면 이미 묘수가 아니고 그 판은 진거라고.. "아아. 주상의 승부수" 운운하는데 승부수를 자주 쓰는건 결과적으로 일 체계가 안 잡혔다는 이야기에요(..) 

2. 이말년

심지어 엠팍에서도 말이 있어요. 이말년은 지금 포텐 절대 회복못하는 거라고(...)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지금 베도에서 놀거나 무명 플랫폼에서 올리는 분들. 혹은 그냥 올려도 인지도 없는 분들중에 이전 1세대 웹툰 작가들 이상가는 분들 정말 많아요. 물론 "숨겨진 진주"이기보다는 열에 아홉은 "넌 4% 정도 부족하니 아직 무명이다. ㅇㅇ"이지만요(비웃는게 아니라 에이전트나 누군가가 그거 지적해서 바꾸면 뜰수있다는) 

1세대 작가인 조석이나 이말년이나 그런 사람들이 과연 지금 기준으로는 베도나 통과했을지 솔직히 궁급합니다.중요한건 우리가 생각하는거 이상으로 포텐이 빨리 소멸되었다는 거지요

그러고보면 명랑만화(혹은 개그물)로 평생 밥먹은 원로 작가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3. 추리소설

순수문학가들이 보는 추리소설 운운때문에 이웃분께서 좀 기분이 상하셨는데. 보통 자칭 주류들이 보는 비주류의 일반적인 시각이라고 보시면됩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주류가 아니면 "띄워는 줘도 아니면 나몰라라"하는게 어느 바닥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학벌이 좋건 스펙을 쌓건 어떻게건 주류에 들어가려는 거구요

주류에 못들어가면 자살하라(..)는건 물론 아니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성공하거나 아니면 그런거 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수 밖에 없는겁니다. 개인적으로 요새 굉장히 실망한 작가이지만 김성종 선생님이 바로 그런 걸(물론 이분도 문예지 등단+ 신춘문예까지 한 문단계에서는 주류쪽이지만)로 입지를 이룬분이니까요(물론 김성종작은 여명의 눈동자 제외하고는 문단에서 인정도 안해준다는)

4. 염상섭 동상

광화문 교보 앞에 염상섭 선생님 등신상이 있어요. 첨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가끔은 "웬 영감태기가 저기 앉아있나"하고 놀랐는데 이제는 친근할정도이지요. 외국인들의 기념사진도 꽤 많구요. 나름대로 일제/해방정국을 치열하게 살아오신 분이니 조그마한 기념이라도 있으면 합니다. 출생지나 활동지 근방이자 서점앞에 세우는것도 나쁜 건 아니거든요

이분이 일제 말에 문단 일 다 때려치고 만주 가셔서 사업하고 만선일보쪽 일 보신 걸로 욕하시는 분들 계시긴 한데.. 이분이 해방후에는 "단정 반대 분단반대" 를 외치고 "백범의 남북협상"을 강력히 지지한 걸 아시는 분은 드뭅니다. 그 댓가로 자그마치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린건 별도구요(북한으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한 정지용이야 그렇지만 황순원 선생님이나 염상섭 선생님. 코주부 김용환 화백이 보련출신인건 모르는분이 많지요. 보도연맹이면 다 죽은걸로 아셔서 ㅋ)









김구는 장덕수 암살이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이승만에 대해 분노하여

북한가고 단정반대했죠












일본 만화 편집자 야마나카, 만화책을 산다면 종이도 사달라고 만화 트윗

https://twitter.com/ComicYamanaka/status/1035104615140708352
해석

 

종이판(紙版) : 종이로 인쇄하는 단행본

 

전자판 : e북, 전자판


 

번역

 

종이 단행본으로 팔리면 기쁜 이유가

 

"전자판은 숫자가 집계가 느리기때문에 종이판의 판매로 단행본의 초동판매부수를 집계한다."

 

"수십년간 신세졌던 서점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찬반양론 허용한다.

 

출판사가 전자판 매출을 싫어하진않는다. 

 

(옮긴이 주 : 돈이 되니 싫어하진 않음)

 

종이판은 다음권 인쇄부수에 직결되며

 

(옮긴이 주 : 단행본 발매 1~2주일이내에 판매되는 부수를 집계하여 다음권은 몇권 낼지 편집부에서 계산함)

 

전자판은 인쇄부수의 개념이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옮긴이 주 : 전자판은 그냥 계약맺어서 전자판 판매 사이트에 올리면 되기때문에 인쇄소에서 찍어내지 않아도 됨)

 

"시대를 맞지않게 종이책을 사거라"든가 "전자판을 사는 사람을 비판하고 싶다"는 의사가 없습니다. 

 

저는 전자판을 많이 삽니다.

 

 

또, 독자에게 종이책을 사달라는 의도도 없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전자판과 종이판을 사는 일중 어느 쪽이 작가에게 응원이 되는지 개인적인 답변을 드리는거지 이상의 의도는 없습니다. 

 

 방금 트윗은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종이판이 팔리지않는고 전자판만 팔리더라도 연재가 중단되지 않습니다.

 

종이판이 안팔리면 종이판을 낼수있지만 전자판이라도 팔리면 연재는 계속 됩니다. 

전쟁발발시 민간인 피난, 통제가 매우 필요하다

다른 예로 어설픈 대처로 피난민과 군인이 혼재되어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1975년 월남 2군단 중부군 사례를 한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1975년 파리 평화협정을 위반하고 전면 남침을 개시한 코뮤니스트들이 

DMZ와 호치민 루트를 따라서 중부고원지대를 공격했다.  

▼피난민과 군병력이 섞이면 작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7.png



여기에서 티우 대통령은 중부 고원지대를 포기하고 다낭과 사이공을 중심으로 

방어명령을 내림으로서 월남 2군단이 뿅하고 사라지는 결과를 만들어 버린다. 

주요 보급 수송로는 피난민과 군인들이 뒤섞여 통제되지 않은체 철수를 했으며  

월남 2군단  병력 ,중화기,물자, 항공기등 75%가 사라진다.  피난민 40만중 10만명이

동부해안선에 도착했고 군인들은 2만명 정도가 후퇴를 했다니 도대체 이들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대재앙을 불러온 반메투오트 전투 결과 : 출처 위키
 
(중략)




이 분산 철수는 연쇄반응을 일여켜 심리적 위축과 혼란을 더더욱 가중시켜서 분산방어 

핵심지였던 동북부해안 중심도시 다낭도 대규모 혼란에 빠져버리게 되고 빠르게 점령 당한다.

일사 분란하지 못한 철수가 부른 대재앙을 한국전과 비교 분석 해보면 어떨까? 

[출처] 한국전쟁 당시 피난에 대해서 생각해 BOJA (보충재업)
[링크] http://www.ilbe.com/10707214946


인민군도 위안부가 있었다.

팩트체크: 미군 위안 여성에 대한 국가의 관리의 기원



1. 503 연간에 그알에서는 박정희 정권때 미군 상대 성매매 여성에 대한 국가의 관리와 인권 탄압에 대한 고발을 한적이 있습니다.그 방송대로라면야 박정희가 순결한 (..) 성매매 여성을 착취 감금하고 국가에서 포주의 역할로 관리한걸로 그려지는데요

박정희야 이런면에서 분명 비판받아 마땅한 사람이지만 굳이 그 기원을 "박정희"로 두는건 굉장히 잘못된 처사입니다. 박정희의 죄라면 과거의 악습을 "고찰생각은 안하고 답습"한 것이지 그걸 만든(.,.) 사람은 "아니"거든요. 물론 그 방송이야 박정희 딸인 503까기+ 박정희의 과거비난의 목적이 짙지만요

자 그럼 미군 상대 성매매 여성의 국가관리는 언제부터였을까요?

2. 이땅에 미군이 진주한게 45년 9월이고 당연히 그때부터 미군 상대 성매매는 있었을겁니다. 다만 그건 "혼자" 해서 프리로 뛰거나(..) 저 같은 개인이 아가씨 몇명(어디서 유혹해서 데리고 오건 일정때 "정신대" 여성 오갈데 없는거 데리고 오건- 실제 이런 드라마 80년대에 있었음 ㄷㄷ) 데리고 사적으로 운영해서 세금 낼름하는(당연히 세금 신고는 안하는) 개인사업자로서 진행되는게 많지요. 문제는 40년대말 미군이 철수하고 이후 전쟁이 나면서 난립하는 개인적 성매매를 국가가 통제해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물론 이 목적은 "붉은 도배 김일성 집단을 물리치는 유엔군을 위문"하는 목적이외에도 "유엔군의 성범죄"를 막기위한 방편도 있지만요(일제하 성노예 제도가 시베리아 출병당시 일본 원정군의 대민사고로 인한 문제때문에 생긴것처럼요- 물론 성노예 제도가 있어도 일본군은 열심히 성폭력을 저질렀지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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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확인할수 있는 정부기관에 의해 공인된 최초의 위안소는 8월초 설치된 마산시의 연합군 위안소 5개소이다. (옮긴이 주: 시당국의 공식 허가증이 있습니다 ㄷㄷ) (중략)

연합군 위안소의 설치는 51년 1월 전선이 38선을 중심으로 교착되면서 본격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중략) 전선의 이동이 미미한 상태에서 미군의 증가는 병사들에 대한 위안을 시급한 문제로 제기했고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위안소의 설치를 촉진시켰다

- 죽엄으로 나라를 지키자. 3장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선인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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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박정희가 먼저 공인한게 아니라는겁니다. 한술더떠서 이 위안소에 대해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관리령이 하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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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는 일선관료들뿐 아니라 이승만을 비롯한 고위관료들까지 개입된 것이 확인된다. 1951년 5월 작성된 대비지(대통령 비서실 지시사항) 2237호인 유엔군 위무방식에 대한 건에 대한 문서는 미군을 위한하는 방식의 댄스홀과 위안소 설치 목적과 운영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이하 이승만의 지시사항 생략)

(전략) 이승만 특유의 문법을 무시한 긴 구어체 문장으로 쓰려져 있고 문서상 "대통령 원본결재"란 인장으로 미루어 이승만이 지시한 사항을 비서실에서 그대로 옮겨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문서는 위안소(댄스홀)의 설치와 목적 관리에 대해 짐작케한다. 이문서에 의하면 위안소의 설치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개입되어 있다. 문서에는 국무총리 장면의  자필서명이 남아 있으며 국무총리외에도 내무부 국방부 장관을 경유하여 각 참모총장과 치안국장 앞으로 보내졌다. 또 문서는 위안소의 설치와 관리에 관해서 지사및 시장 경찰과 협의하도록 지시하고 있어.(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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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박정희는 과거 정권의 폐해를 답습한 것이지요(...) 

이런 공인 위안소는 부산일보 보도에 의하면 52년 7월에는 78개소가 있었고 여기에는 앞서말한 개인적인 영업을 하는 수백개의 사창가는 "제외"한겁니다. 즉 국가에서 관리하는게 78개라는 거에요(..) 심지어 휴전직후 서울신문에서는 아예 서울시 특정 지구가 이런 전문 사창굴로 변한것에 대해서 한탄하는 기사도 나올 정도입니다. (더 무서운건 이런 특정 지구가 유엔군용 따로 국군용 따로 라는 ㄷㄷㄷ) 

보통의 경우 정부 등록 성매매 여성이 2만 6천명이고 미등록 여성이 북한(..) 선전물 같은데서는 5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만 보통의 연구자들은 10만 정도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이건 당대 보건조사나 내무부 자료를 유추하면 얼추 맞아 떨어지는 숫자이고 10만으로 간주해도 1949년 15에서 34세 여성 인구기준 3.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이지요.

이러다보니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당대에는 "조혼"을 했기때문에 이런 성매매 여성이 "처녀"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성매매하면 처녀가 아닌건 당연한 말장난이지만 제 이야기는 "성매매에 발을 들여놓기전에 이미 기혼"이었다는 걸 유추할수 있지요. 남편이 전쟁에 나가서(남이건 북이건) 죽었거나 혹은 돌아오지 않아서 처지가 궁한 부녀자들이 이런 일에 나섰다는 겁니다.  실지로 서울여자경찰서에서 51년 하반기에 단속한 여성중 80%가 기혼자였고. 보건부통계로 미군 성매매종사자의 66%가 결혼생활 경험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실태는 다음의 이야기로 표현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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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가정주부가 성매매로 검거되는 일)이 있으면 가정조사를 해서 내놉니다. 이것도 유엔군 헌병은 내주면 안된다고하고 경찰은 왜 안내주냐 하고 말하기 어려워요. 대개 일선에서는 8시에서 11시에 잡는 모양인데 애들을 딴 방에 재우고 일을 하다가 그대로 잡혀오니 어린애들은 어머니를 찾아서 울것이고 붙들려온 사람들은 시민증도 못가지고 나오니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닙니다.
- 1951년 좌담회에서 여자경찰서장 이윤홍의 발언 같은 책 211

(전략)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스스로 포주가 되어 허가증을 내주고 일정 지역에 집결토록 하거나 허가 받지 않은 위안부를 검거하여 미군 주둔지역에서 격리시키는 것이다. 특히 전투지역인 한강 이북이나 경기북부 지역에서 검거된 위안부들은 한강 이남으로추방되었다. 그러나 한강 이남으로 추방된 위안부들은 다시 전투지역으로 갈수 밖에 없는데 이는 어린아이등 가족이 전투지역에 남아있거나 성매매이외의 생존을 위한 수단을 마련하지 못하는 한 피할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 같은 책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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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은 비참한겁니다.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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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리 : 역사 2018/08/3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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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볕정책의 괴뢰 재인 2018/08/30 15:17 #
인민군에는 왜 위안부가 없을까요? 전쟁 탓으로만 돌릴 수 없습니다.
 햇볕정책의 괴뢰 재인 2018/08/30 15:28 #
노태우때는 미군위안부 피살사건이 발생하자 가해 미군을 잡아 처벌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때는 미군위안부 피살사건이 3건이나 발생하였는데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모두 공소시효를 넘겼죠. 
http://qindex.info/d.php?c=88
그런데도 이정희 등은 노태우때 이야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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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52700209102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5-27&officeId=00020&pageNo=2&printNo=8277&publishType=00010

혹은 부녀자들을 공장또는 간호부 심지어는 그들의 위안부로 발하는등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51300209205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05-13&officeId=00020&pageNo=5&printNo=21116&publishType=00020

인민군 내부에는 여군들을 전선에 배치된 위안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있었다.




인민군도 위안부가 있었군요.


생활이 안풀리면 호화생활은 포기해야

여러가지 8.27


1. 어떤 미친놈

모 "작가" 나부랭이가 SNS에서 잉여로운 삶과 노인은 모두 죽어없어져야 한다는 글을 남기면서 "수명은 점점 늘어나는데 정부가 수명을 통제해야한다" 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 사람은 정부(심지어 자기가 찍은 그 정부도) 가 "임의로 너 죽으라"고 하면 기꺼히 죽어줄 의향이 있을까? 

흔히들 하는 이야기(오해가 좀 있지만) 로 "밀덕들은 반공이다. 밀덕들은 수꼴이다"라고 하지만 왜 SF 작가들은 이렇게 최소 개념조차도 없는 종자들이 버글거릴까? 수명이 어떻게 되건 재산상태가 어떻게 되건 "내가 정당한 방법으로 벌고 법적으로 내 소유권"인건 누구도 통제할수 없고 해서는 안된다. 

2. 동반자살

해서는 안될 일이 "사업실패해서 가족과 함께.."라는 일이다.하지만 10%정도는 이해 가능한게 "가장이 떠난후에 극도의 가난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겪는 지옥 같은 삶에 대한 이해이다. 적어도 사회생활을 했다면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떨어지는 걸 누구보다도 아니까 그런 선택을 하는게 아닐까? 속칭 동반자살을 뭐라하기에는 이미 "자살"을 결심한 순간부터 그 영역은 벗어난게 아닐까?

3. 동반자살2

전에 어떤 미친놈이 지가 자살한다고 가족만 죽이고 도주하다가 잡힌(..) 사건이 있었다. 한때는 잘나가다 퇴직후 일이 좀안되서 (그러나 그 생활은 그런대로 유지하면서) 벌인 일인데 그때 많이 나온 댓글이 "차라리 그 집 팔아서 인천이나 부천에 가면.."이었다. 이런 사고로 나온게 유명한 "이부망천" 망언이 아닐런지 ㅉㅉㅉ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하지말자. 막상 그 상황이 되면 과연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것인가?


나의 생각 : 생활이 안풀리면 호화생활은 포기해야


모 특수고 논쟁이나 이런게 활발할때 "자기 입장에 따라 언제든지 이념을 바꾸는" 인간도 봤고 tv에서 "자살하지 맙시다. 삶은 기쁩니다"라고 하던 분이 병이 악화되서 동반자살(..) 하는것도 봤다. "한국은 엘리트 주의가 말아먹은거"라고 지롤 염병하다가 엘리트 주의 드라마나 만드는 소위 작가놈도 봤다.. 훌륭하신 분들도 그럴진데 일개장삼이사가 과연 그 나락에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보장이 있겠는가?

4. 결론

간음이란 중죄중중죄이다. 그런데 간음하던 여성에게 돌을 던질때 예수는 (심지어 그는 그 간통현장과 무관한 3자이다) "죄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치라"라고 외쳤다. 나도 자살이나 동반자살을 혐오하지만 과연 내가 그런 선택을 한 자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나 될까 미래에 그 모습이 내모습이 안되리라는 보장이 어디있겠나? 









예수라면 성전앞에서 노점상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를 강조했던 그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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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근거는 무엇이지요?

반도의 흔한 여성 인식(50년대의 위안여성 문제)


전략: 외국인 상대 성매매 여성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후)

이는 한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과 성관계를 맺으면 바로 민족성. 순수한 혈통을 잃는다는 관점으로 1950년 한 일간신문(부산일보)은 유태인의 예를 들면서 남성이 외국인과 결혼하거나 성관계를 갖는것은 부계혈통을 외민족에 번식함으로서 자민족의 세계적 민족번영과 공고한 국민정신으로의 자기 세력의 강화이지만 여성이 외국인과 결혼하거나 성관계를 갖는 것은 민족적 투쟁과 재기 광복을 위한 순결한 민족성의 불순화를 초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선인 죽엄으로서 나라를 지키자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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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대동아 전쟁이 끝난후 일본은 소위 미인계 정책을 사용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그들 일녀 유엔공주들은 돈만 알지 않고 나라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간간히 던졌다 한다. 모름지기 이들의  외교 사명은  적지 않은 공을 이루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보다 더 위급한 조국의 현모양을 눈앞에 보며 전쟁을 파는 여인들이여. 그대들에게는 조국도 없는가?

- 같은 책 218 경향신문 (...) 사설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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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평: 저기 태평양 하구에 처넣어도 시원찮을 남자놈들... 저기 지옥에나 가거라.. 

저따우 미친 소리들이 있으니 일본군 성노예가 50년대에도 자주 이야기 되었지만 피해여성들에 대한 처우가 개판이었던건 당연한거고(뭐 지금도 저런 사고방식 가진 미친놈들이 버글버글하고 ㅉㅉㅉ)

대동아 전쟁... 운운은 야마호카 소하치(대망의 바로 그 작가)가 한 이야기의 동어반복입니다. 사실 일본여성들이 무슨 애국심으로한건 아니고(심지어 지금 우익조차도 숨기려는 추한 일이에요) 전쟁후 전시 위안부 동원 여성(당연히 조선여성도 포함되었겠지만)들을 "어차피 니네 몸 망친거 나라 위해 공창에 가서 일해주"라고 알선해준게 일본정부에요. 한국이건 일본이건 정조가 생명인 사회에서 전시에 자의건 타의건 순결을 잃은 사람들이 갈곳이 없으니까 더 그런거구요

무슨 술자리나 일간베스트에서나 할 이야기를 유력 일간지와 고위급 관계자가 대놓고 하고 있으니 ㅉㅉㅉ

더 개그는 당대 서울여자 경찰서장조차도 미군 접대 여성에 대고 대놓고 저 이야기를 했다는 ㅋ

덧: 상기의 서적에서는 그알의 발광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미군 상대 접대여성에 대한 국가적 관리는 이승만때부터 이미 대통령 전결로 시작한거"라고 까고 있습니다. 어쩌면 박정희는 과거 정권의 그걸 그대로 답습한거죠. 그알에서 사실 왜곡한건 503때문이겠지만 ㅉㅉ















근데 근거는 무엇이지요?





북한의 역도산 만화



책 제목 : 역도산이 왔다




북한 만화가의 오너캐 그림



2003년에 나옴



북한 찬양은 짤라버림

일본에도 번역출간된 만화


일제시대



일본사람 : 역도산을 일본으로 데려간다네


헌병 등장


저건 근근웹 일빠가 "일본은 증오해야하지만 일본 애니는 좋다~"스럽다





역도산 : 나의 이름을 뺏지마라



일본신민, 근근웹 일빠의 꿈



도주하는 역도산



현장감독 : 폭력으로 부하들을 통제



반미만화이다




이후로 역도산은 프로레슬러가 된다




명치를 때리다니!



저런식으로 구급차에 넣다니



김정은 닮았다



하지만 흉악한 음모로 다치게된다


괴한이 사이다를 강제로 먹인다



일단 괴한의 정체는 복면에 쌓여있다



원본을 일본어로 직역한 버전

그(역도산)이 말했던 조선사람이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님을 높이 떠받드며 살아가는 조선인이라는거였지




복면 괴한탓인데 의사탓으로 돌림




감수 맡던 프로레슬러 김남훈(일본어 가능) : 어이가 없네



로젠메이든 제로 1권.jpg


킹 오브 아이돌 5권, 아무튼 귀여워 2권 감상.jpg







아무튼 귀여워 2권 : 작가 특유의 길게 늘여서 그리는 버릇이 발동되었으며

인물소개라고 보기에는 호흡이 너무 길다

킹 오브 아이돌 5권 : 아스카 집안의 후계자, 아스카 미라이는 고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가업을 이어받으라는 어머니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이돌의 길을 간다.

내가 생각해도 그녀의 결정이 옳다. 

젊은이는 기업을 경영할 통찰력이 없다

혈통으로 기업을 물려받으면 안된다. 아돌프 히틀러도 군주제의 후계자는 구멍가게도 운영할 능력이 없다한다.

연예인은 기업을 경영하면 위험하다. 왜냐하면 연예인들은 매니저가 모든 행정을 했기때문에 

세상물정을 모른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사기를 잘 당한다.







아무튼 귀여워는 잘 팔리고 있으니 선박우편(늦게 도착해도 된다)으로 구매보고를 보내고

킹 오브 아이돌은 잘 안팔리고 있으니 항공우편(선박우편보다는 빠르다)으로 구매보고를 보낸다.








픽시브 팬박스 지원을 중지해보자






나는 픽시브 팬박스 후원을 긍정적으로 생각,홍보하는 사람이지만

픽시브 팬박스 후원을 쉽게 중지할수있어야

수많은 사람들이 픽시브 팬박스를 후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픽시브 팬박스를 후원할수있지,

픽시브 팬박스는 후원중지가 불가능하다고 소문나면 픽시브 팬박스 후원은 줄어들것이다







자신이 지원하던 작가를 클릭해보자(모자이크되어있다)







마우스 커서를 내려보자








지원중이라는 문구를 클릭하자








커서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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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을 중지한다








쉽게 후원을 중지할수있어야

쉽게 후원이 들어온다





오늘 도착한 만화들 리뷰




즉사치트 1권 : 일단 캐릭터들은 잘 그림

동경핵격 : 각시수련 블로그 보고 사게됨. 결말이 불길함을 암시

만화 가이드북 : 작가는 성인여성을 그려야

재패니즘 : 태권더박을 보기위하여 산다. 

함께 연재되는 애국소녀 우요코쨩 작가가 바로 소프트 에로 만화의 거장, 고바야시 타쿠미 선생이다








(스포) 애국소녀 우요코쨩 5화



우요코는 가족들과 함께 성묘를 간다. 

증조할아버지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종전후 일본에 돌아와서 사망



우요코는 할아버지에게 태클을 거는 망상을 한다.



우요코의 증조 할아버지는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묵묵히 일만 하고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PTSD로 악몽을 꾼다.

극우소녀 우요코도 반성을





출처 재패니즘 44호(태권더 박과 함께 연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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